삐딱선을 타고 순항 중입니다-2 엄마라는 바다
정확한 기억은 나지 않는다
우리는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한 배에 타고 있다
적당히 크고 적당히 작은
평화롭고 아늑한 배
우리는 그 배를 타고 있었다
엄마, 큰오빠, 큰언니, 작은 언니, 나
아빠는 없었다
80년대 중반까지 아빠는 한창 건설붐인 사우디에서 일하고 계셨고
아빠는 내게 실존하는 존재가 아닌
사진으로만
지도상에서 멀리 떨어진 모래가 많은 나라에 사는 사람이었다
과거가 없으니 현재가 없고
추억이 없으니 그리움도 없었다
사우디에서 전화가 오는 날이면
엄마는 나를 불러 수화기를 내 볼에 붙이고
아빠에게 인사를 하라고 했다
"세희야, 아빠야
인사해. 아빠한테 보고 싶다고 말해 "
나는 서툰 아역 배우가 대본을 읽듯이
엄마가 시킨 대로 말하곤 했다
아빠의 웃음소리와 어색함
나는 수화기를 얼른 얼굴에서 떼어 놓고 싶었다
큰오빠 큰언니는 무뚝뚝한 편이었고
작은 언니는 애교가 많아
아빠와 주절주절 주절주절 말이 많았지만
나는 그리움이 무엇인지
애틋함이 무엇인지 모르면서
" 보고 싶어요. 빨리 오세요 "라는 말만 했다
' 어린 나의 말이 아빠에게 위안이 되었을까? '
황토색의 모래 바람과 맞서 일하고
모래가 섞인 밥을 먹으며 아빠는 꼬박꼬박 돈을 보내주셨고
엄마는 아빠가 부쳐준 돈을 허투루 쓰지 않고
집도 두 채나 장만하고 여기저기 돈을 불리며
우리들을 살뜰히 보살폈다
언니들 오빠는 학교에
나는 선교원에 가면
엄마는 여성센터에 가서 한식, 양식, 일식, 미용 각종 자격증을 땄다
아빠가 오면 가게를 차려 돈을 벌어야 한다고 했다
학원에서 일찍 오거나 엄마의 수업이 늦어지면
나는 엄마가 보고 싶어 여성센터로 한참을 걸어가서
그곳 정원에 앉아 공기놀이를 하거나 엄마를 가만히 기다리다
노을이 지는 초저녁
하늘을 등지고 흰가운을 입고 나오는
예쁜 엄마의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엄마를 사랑했다
나는 엄마가 참 예쁜 사람이라고
세상에서 가장 마음 착하고 고운 사람이라 여겼다
나는 엄마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엄마는 나를 어디든 데려가려고 했다
내가 터울이 많이 져서 어리기도 했지만
막내라 나를 귀여워하셨다
나도 엄마를 무척 좋아해서 어디든 엄마를 따라가려고 했다
엄마는 18살 내가 고 2 였을 무렵
결혼이란 걸 했고 큰오빠를 언니들을 줄줄이 출산했다
나는 27살의 엄마에게서 나온 마지막 아이다
내가 27살에 결혼을 하고 서른에 딸아이를 낳았는데
엄마는 내 나이에 나를
엄마의 마지막 아이를 낳았다
국민학교 저학년 무렵
나는 학교를 결석하고 엄마와 포항으로 여행을 떠났다
그 여행에서 나는 어린 나를 잃어버렸다
포항으로의 여행
엄마의 친엄마를 찾기 위한
엄마와 나의 여행
엄마는 새엄마 밑에서 자란 구박받는 전처소생 맏딸이었다
그러면서도 엄마는
친엄마가 미우면서도 몹시 궁금했나 보다
왜 자신을 외삼촌들을 버리고 재가를 했는지
재가를 해서는 잘 살았는지
배다른 형제자매들은 잘 키우고 사는지
궁금했나 보다
아니 궁금하기보다는 원망하고 싶은 대상을 찾고 싶었나 보다
서울에서 포항
포항에서 한참 버스를 타고
구룡포라는 작은 어촌에 도착했는데
크고 좋은 기와집에서 할머니가 살았으면 좋으련만
주소에 적혀있던 할머니의 집은 너무나 작고 초라했다
작은 초가집처럼 할머니 역시 쓰러질듯 약하고
궁핍해 보였다
그래도 엄마는 할머니를 보자
' 엄마 ' 하고 부르면서 울음을 터트렸다
처음 본 할머니도 엄마의 이름을 부르고 우셨다
할머니의 옆에 서있는 키가 크고 마른
이모라는 분도 엄마를 안고 울었다
세 명의 어른 여자들이 울었다
나는 울지 않았다
나는 그들이 신기했다
단지 엄마와 딸 언니와 동생
긴 세월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들이
엄마와 딸이라는 이유로
자매라는 이유로 운다는 것이 참으로 낯설고 이상했다
불편했다
어서 집에 가고만 싶었다
그 밤
엄마와 나, 할머니, 이모는 한 방에서 잠을 잤다
어린 엄마가 결혼을 하기까지
결혼 후 겪은 모진 시집살이부터
남편 없이 사는 현재까지
엄마는 가슴속에 켜켜이 쌓아놓은 설움과 미움 원망을 할머니에게 쏟아냈고
할머니와 이모는 미안하다 연신 말했다
나는 잠을 자는 척했지만
속으로는 너무 놀라고 슬퍼서 잠을 잘 수 없었다
어린 엄마가 겪었을 구박, 설움, 폭력들이
할머니 집 앞
거친 파도처럼 철썩철썩 소리를 내며
그대로 내게 물밀듯이 밀려왔고
나는 밤새 그 파도를 맞고 흠뻑 젖어 버렸다
슬픔이란 것이 어떤 것인지
그 밤 깨달아버렸다
그날 밤
나는 순진무구한 아이에서
슬픔을 아는 어른이 되어버렸다
세상에서 가장 착하고 예쁜 우리 엄마
나를 사랑하는 곱고 강한 엄마가 아닌
이제 내가 돌봐주고 보호해야 할 사람
내 마음속 엄마는 그렇게 변신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