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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상 소설가 Oct 24. 2022

깍두기를 담갔다

" 전에 깍두기는 맛이 이상했어. 이번 건 맛있을까? "

" 응, 무가 달고 즙이 많아. 맛있을 거야 

  맛들기 전에 먹을 것만 조금 남기고 다 버리자

  통 좀 씻어줘"


남아있는 깍두기를 버리고 난 뒤 고춧가루가 붙어있는 김치통을 씻어 달라 부탁했다

번잡스러울까 주방을 피해 베란다로 통을 들고 가는 남편을 보니

맘이 뭉클하며 짠해진다


' 새로 담가 달라고 말을 하지 

  어려서는 맛이 없다, 먹기 싫다 말하더니 군내 나는 깍두기를 참고 먹었네

  이제 너도 묵은지처럼 맛이 깊어졌구나'




중간고사가 끝나면 주말 수업을 미루고 여행을 다녀온다

단골 여행지는 언제나 강원도이다

이번 여행지는 정선과 영월

웅장한 설악산, 파랗고 시원하며 힘이 센 동해를 보는 것도 좋지만

때로 아기자기한 산과 평화롭게 잔잔히 흐르는 강을 보는 것도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내가 좋아하는 석회암 동굴은

찰나의 순간을 살아가는 나를 깨닫게 해 준다

오만하게 살지 말라고 내 허리와 머리를 굽혀

나를 겸손하고 겸손하게 또 겸손하게 만든다


' 나는 지구를 잠시 기어 다니는 개미 같은 존재야 '


오늘만 감사하며 행복하게 살자




지금 강원도는 고랭지 배추와 무 추수가 시작되고 있다

그중 맛있어 보이는 무와 배추를 샀다

여행 도중 지역 재래시장에 들러 싱싱한 채소와 먹거리를 사고 

시장 음식을 사 먹는 것은 우리 여행의 필수 코스 중 하나이다

게다가 운 좋게 맛 좋은 음식을 먹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다


음식을 남김없이 깨끗이 먹은 뒤

식당 사장님께 맛있게 잘 먹었다 감사하고

안녕히 계시라 웃으며 인사를 나누면

사장님도 나도 마음이 한결 따듯해진다

그렇게 우리의 여행은 행복하고 

우리는 다시 몇 달을 살아갈 힘을 얻는다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 오자 마자 깍두기를 담갔다

소금에 절인 지 얼마 되지 않아 무에서 물이 많이 나왔다

간을 보니 짜면서도 달달하다

무, 알배추, 양파, 쪽파, 갓, 마늘 생강 각종 양념 등을 버무려 깍두기를 담갔다


우리 식구는 모두 시원하고 물이 많은 깍두기를 좋아한다

진득하고 매운 깍두기보다 조금은 하얀 깍두기가 더 맛있다

그리고 더 예쁘다

나는 깍두기를 담그고

남편은 짐 정리를 마치고 

각자의 할 일을 하느라 분주하다


짐을 푸르자마자 바로 깍두기를 담그는 내게 남편은 


" 오늘은 쉬고 내일 하지 힘들 텐데 "

" 평일은 바빠서 시간이 없어.  오늘 아니면 시들어서 안돼 "

" 이제 그만 담그고 사 먹지 "

" 배추김치는 사 먹어도 되지만 무김치 종류는 맛이 없더라 "

" 그래도 힘든데....."

" 맛있게 먹으면 돼 한번 먹어봐"

" 나는 먹어도 잘 모르겠더라 맛있는 것 같은데 "

" 그래? "

 

나는 소금과 젓갈을 조금 더 넣는다 


" 왜 더 넣어? 지금이 좋은데 "

" 지금 맛있으면 안 돼  그럼 나중에 싱거워

  무는 물이 계속 나와서 마지막으로 간을 볼 때 좀 짜야해 "


남편은 입에 넣어준 깍두기를 우적 씹다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제자리로 돌아간다

깨끗이 씻은 통에 새 깍두기를 넣기 전은 항상 신중해야 한다

우리가 한 두 달 먹을 소중한 음식이다


' 지금 맛있으면 안 돼

  보름 뒤 한 달 뒤에도 시원하고 맛있게 먹으려면 지금은 좀 짜야해 '


나는 소금과 젓갈을 더 넣었다

달콤했던 깍두기는 더 넣은 젓갈과 소금으로 인해 아리고 짜졌다

그제야 나는 안심이 되고 웃을 수 있다


' 며칠만 지나면 맛이 들 거야 

  무랑 배추가 맛있어서 한 참 동안 맛있는 깍두기를 먹을 수 있겠어 '


깍두기 하나를 담그는 것도 이렇게 충분히 생각하고 신중해야 하는데

다른 일은 어떨까?


호들갑 떨지 말자

좀 더 진중하고 차분해지자


갑자기 피식 웃음이 나온다

깍두기로 시작해 삶의 자세까지


어젯밤 담근 김치통의 뚜껑을 열어보니

벌써 무 배추 양파 각종 채소의 즙이 나와

단맛이 코까지 올라온다

맛있게 먹을 남편과 딸을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가볍고 행복하다

오늘 하루 시작은 향기로울 듯하다


나는 너를 사랑해

내가 먹지 않아도 맛있게 먹는 너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불러서 자꾸만 웃음이 나와

나는 너를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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