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2 MT가 취소된 건 다행이었어

지후 이야기

by 옥상 소설가

MT 가 취소된 것은 다행이었어.


다른 남자들과는 스스럼없이 얘기하고, 목소리도 크고, 소리 내어 웃었지만

내 눈과 마주치면 발 그래 지면서 얼른 시선을 떨구었다.

‘ 부끄러움을 잘 타는구나. ’ 그 모습이 귀여웠다.


동아리 MT가 갑자기 취소되고,

엄마의 말랑한 팔뚝 살을 꼬집으며, 거실 소파에 누워 TV를 보고 있었다.


‘ 오늘은 실컷 잠이나 자야지.’

“ 일어나 앉아봐, 치수 좀 재게 ”


엄마는 뜨고 있는 조끼가 내 가슴 품과 맞는지 줄자로 이리저리 재고 있었다.


“ 눈도 안 좋은데 이제 그만 뜨개질 해. ”


엄마는 뱅글뱅글 돋보기를 쓰고 남자들의 조끼며, 스웨터, 목도리를 끊임없이 뜨고 있다.

무엇이 그리도 흐뭇한지 생글생글 웃으면서 기계처럼 뜨고 있었다.


“ 형 뭐해? 빨리 나와. ”

“ 어, 갑자기? 무슨 일 있어? ”

“ 나와서 술 한잔 하고 놀자. 여기 신림동이야. ”

“ 그래, 금방 나갈게. ”

“ 엄마, 나 민준이 만나고 올게. 저녁 먼저 먹어. ”


엄마가 떠준 카키색 스웨터, 하얀 목도리, 검정 코트를 입고 문을 나섰다.

아파트 고층 사이로 부는 겨울바람은 “ 웅웅~ ” 메아리를 외치며 여기저기 돌아다닌다.

그 메아리를 맞으면 온 몸이 얼어붙는 듯했다.

바람을 맞을까 목도리로 가늘고 긴 목을 칭칭 감고

어깨를 동그랗게 말고 잰걸음으로 걸어갔다.


퇴근 시간의 열기로 버스 유리창은 온통 뿌였다.

긴장이 풀리며 노곤해졌다. 너무 더워 머리가 띵하고 멀미가 나는 것 같았다.

“ 형 , 여기야, ” 민준은 손을 흔들었다.

까르르~ 웃음소리와 “ 왔다, 왔어. 좋겠다, 좋겠어. ” 들으라는 듯한 소곤거림이 들렸다.

호프집 가장자리 테이블에 민준과 희수, 낯선 커플, 그리고 한 여자가 앉아 있었다.


“ 오늘 희수 고등학교 친구 졸업식인데, 술 한잔 하자고 모였어. 짝이 안 맞아서 형 불렀어. ”

“ 어 그랬구나. 잘 됐네. ”

“ 세희 씨가 외롭다고 괜찮은 남자 불러달라고, 혼자면 집에 가겠다네, 이상형을 들어보니 딱 형이야,

형 불러달래. “

“ 어, 이상형? 내가 이상형이라고? ” 웃음이 나왔다.


‘ 내가 선택당한 건가? 이 당돌한 여자는 누구지? ’

“ 응, 착하고 똑똑한 모범생 남자를 만나고 싶데. 그러니까 딱 형이 생각나던데. 잘했지? ”

“ 그래. 고맙다. ”


세희는 나를 보고 씽긋 웃었다.

방학이라 못 만났던 민준과도 동아리며 과 소식을 이야기했고

같은 공대생인 형과도 첫 만남이었지만 전공 이야기로 잘 통했다.

여자 아이들은 오랜만에 만났는지 고등학교 담임, 학주, 가출한 친구 근황, 여러 소문들을 전달하고 풀어내느라

남자들은 안중에도 없었다.

오래되고 익숙한 사람들처럼 편안하고 재미있었다.


갑자기 취소된 MT가 다행이라 여겨지고 신기했다.

술을 마시고, 게임을 하고, 벌주를 마시고, 시간은 벌써 11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다시 새내기로 돌아간 듯했고, 밤새도록 놀고 얘기하고 싶었다.

“ 저, 이제 일어나야 할 것 같아요. 마지막 지하철을 타야 해서. ”

“ 형, 세희 씨 데려다 주지 그래? ” 민준이 나를 쿡쿡 찔러댔다.

“ 아니요, 괜찮아요. 바로 역 앞인데요, 뭘..... ”


세희는 먼저 일어나 다음에 또 보자고 아쉬운 듯 인사를 했다.

나는 얼른 따라나가 세희를 지하철역까지 데려다주었다.

전화번호를 물어봐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심장이 서서히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몸이 떨리고, 고막이 진동하고, 귀가 먹먹해졌다.

심장 소리와 떨림이 그녀에게 전달될까, 들킬까 표정을 살폈다.

“ 조심히 잘 들어가세요. ” 간신히 입을 열었다.

“ 우리, 다시 만나요. ” 세희는 씽긋 웃었다. 그렇게 나는 그녀를 보냈다.


세희가 자리를 떠나고, 500cc 맥주를 한 잔 씩 더하고 우리는 헤어졌다.

그녀가 먼저 떠난 뒤 분위기는 조금 가라앉은 듯했지만

즐거웠다고 갑자기 떠난 MT 같았다고 모두들 즐거워했다.

다음 만남을 약속하며 모두들 버스 정류장과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조금 더 일찍 만났다면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류장으로 향하는 길에서도 버스 안에서도 세희가 떠올랐다.

그녀와 얘기를 나누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 우연일까? 운명일까? ‘


오싹한 한기가 느껴졌을 때, 코트 단추를 채우지 않은 것을 알았다.

목도리도 긴 목에 걸쳐져 있을 뿐이었다.

' 겨울이지.... ' 계절이 생각난 건 아파트 입구를 지나서였다.

코트를 다시 고쳐 입고, 목도리를 다시 감았다.


고개를 갸우뚱했다. ‘내가 왜 이러는 거지?’ 오랜만의 낯선 감정이 오히려 반가웠다.


민준은 집에 들어온 나에게 바로 전화를 했다.

“ 형, 세희 씨 어때? 괜찮지? 전화번호 받았어? 성격도 좋은 것 같고 재미있더라.

얼굴도 그 정도면 예쁘고, 나 같으면 사귈 것 같은데, 형은 어때? “


민준은 흥분하고 신난 것 같았다. 자기가 소개팅을 한 것처럼 어서 애프터를 하라고 성화였다.

“ 형 커플 돼서 더블데이트하면 정말 재미있을 것 같지?”

“ 응, 괜찮더라. 근데 나 전화번호는 안 물어봤어. ”

“ 내가 희수한테 전화번호 받았는데 가르쳐줄까?”

“ 그래, 알려줘.”


나는 세희의 번호를 받았다.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 일어난 년도처럼, 수험생 마냥 외우고, 다시 외우고, 통째로 암기해버렸다.

“ 저, 지후예요. 기억하세요?”

“ 아, 네 기억해요.”


매일 저녁 같은 시간 나는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항상 벨이 3번 울릴 때쯤 전화를 받았다.

우리는 소소한 하루 일과며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내일 통화하자고 아쉬운 듯 통화를 끝냈다.


“ 세희 씨, 우리 영화 보러 안 갈래요?”

“ 보고 싶은 영화가 있었는데 좋아요.”

“ 그럼 이번 주 토요일 10시에 종로 서울 극장에서 만나요.”

“ 알았어요. ”


주말에 만나서 정식으로 프러포즈해야지.


매표소 앞에 서 있는 나를 보며

세희는 조금 늦어서인지 총총거리며 서둘러 걸어왔다.

정장을 입었던 월요일과는 달리 찢어진 청바지에 검은색 폴라티, 더플코트를 입고 나왔다.

졸업식의 그녀가 아닌 듯했다.


“ 어, 키가 좀 작으시네요.”

“ 아, 그래요, 계속 앉아 있어서 몰랐었나 보네요.”

“ 나는 착한 모범생을 좋아해요. 그래서 그쪽을 불러달라고 했어요. “

난데없는 고백에 당황하는 나를 보며 세희는 웃으며 말했다

수줍어했던 아가씨는 어디에도 없었다.


“ 무슨 영화를 보고 싶어요?”

“ 아메리칸 뷰티요.” 망설임 없이 영화를 선택했다.

“ 영화 소개하는 프로그램에서 봤는데 아카데미 5관왕이고, 내용도 참신하데요. ”

“ 그래요, 그럼 그 영화 봐요.”

아메리칸 뷰티는 다소 파격적인 이야기였다.

영화의 줄거리를 알지 못했던 나는 보는 내내 땀이 났다. 첫 만남에 볼 영화는 아니었다.

세희는 영화 속 베드신에도 불편해하지 않고, 집중한 듯 아무 말도 없었다.


“ 우리 뭐할까요?”

“ 영화 한 편만 더 보면 안 될까요? 제가 평일엔 과외랑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영화를 볼 시간이 없어서요.

철도원이라는 영화도 감동적이라고 하던데.... 그것도 보고 싶어요. “

“ 그래요, 그럼 그것도 봐요.”


두 편의 영화를 연달아 보고 나서야 우리는 차를 마실 수 있었다.

극장 앞마당이 보이는 카페에 앉아 영화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다.


“ 철도원은 평이 좋았는데, 너무 인위적이네요. 역시나 일본 영화는 정서적으로 안 맞아요.

일본 사람들은 왜 자신보다 집단이나 직업 명예 소명의식 이런 것을 더 중요하다고 생각할까요?

그렇게 사는 게 행복할까요?

일본 영화 중에서 젤 좋았던 건 러브레터 밖에 없어요.

사실 그것도 여자가 넘 수동적이라서 마음에 좀 안 들었어요. “

“ 차라리 아메리칸 뷰티가 더 좋은데요. 막장 영화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솔직한 게 더 좋아요.

가족 관계라는 게 겉으로 보기엔 좋아 보여도 이기적, 위선적, 폭력적이기도 하잖아요.

어쩌면 우리는 누가 더 행복해 보이나? 가족 놀이를 하고 살아가는지도 몰라요.

모두들 그 게임에 참여하는 플레이어인데, 정작 본인들은 참가자인 줄도 모르고 있죠. "


그녀는 한참을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한 마디도 하지 못하고 그녀의 말만 들었다.

더 이상 영화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기억나지도 않았고 중요하지도 않았다.

우리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 내가 3살 더 위니까, 나 말 놓을 게, 괜찮지? ”

“ 아,.... 네 그러세요.” 그녀는 조금 놀란 것 같았다.

“ 나 너를 만나고 싶은데, 우리 사귀는 게 어때?”

세희는 눈빛이 잠시 흔들리더니 연한 눈빛과 미소를 지었다.

“ 그래요, 저도 좋아요.”


세희와 나는 커피를 마시고, 늦은 점심을 먹고, 다시 차를 마시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주고 싶었지만

집까지 데려다 줄 필요는 없다고 한사코 지하철 역에서 헤어지자고 말했다.


오랫동안 앉아 있어서인지 엉덩이와 허리가 뻐근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세희를 생각했다.

아니 그녀가 뱉었던 말들이 생각났다.


“ 사람들은 우리 가족은 행복하다고, 화목하다고 서로를 위한다고 말하는데

무엇이 가족인지, 화목이고 행복인지, 서로를 위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어요.

그 사람들은 정확히 알고 그런 말들을 하는 걸까요? 내가 이상한 걸까요? “


세희는 정말 궁금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그래, 나도 그런 생각들을 한 적이 있었지,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했어.

할 일은 없고, 시간이 남아도는 사람들이 하는 망상이라고 여겼지.

나도 가족들 틈에서 느끼는 외로움, 불편함을 드러내거나 말한 적은 없으니까. ‘


‘ 세희는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걸까? ’


그녀가 그녀의 가족들이 그녀가 살아왔던 시간들이 궁금해졌다.

타인에겐 무관심한 무심한 사람이었는데......

세희란 여자에 대한 호기심이 일었다.


세희가 나에게 했던 질문들

그것들은 모두 가족 간에 말하면 안 되는 암묵적인 금기어들이었다.

그녀를 만나면 적어도 이런 감정들에 대해 편히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무감각했던 나의 감정을 흔들어 줄 것 같았다.


‘ 그래 MT가 취소된 것은 다행이었어. ‘







이전 02화ep- 1 검댕이를 토하는 남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