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에나는 먹잇감을 절대 놓치지 않는다. ep-5
김동주를 내가 처음 본 것은
선교원에 들어간 여섯 살 때였다.
모든 아침
우리는 인간다움을 포기하고 본능만이 존재하는 자신과 서로를 마주했다.
“ 빨리 나와, 제발 좀 빨리 나와. ”
화장실 앞에서 문을 발로 차고, 부서져라 두드리고
들어가서는 인간다움을 뿜어대는 향기에 구역질을 하면서도
기어코 먼저 들어가려 난리였다.
본 채 밖 화장실의 상황은 아비규환 그 자체였다.
엄마는 샬롬 교회 집사
언니들과 오빠는 모두 중등부, 고등부
나는 유치부 예배 참석
매주 일요일 아침 그 수선스러움은 더했다.
교회에는 호감을 가진 이성이 반드시 존재하고
여중과 남고를 다니는 언니 오빠에게
하나님과 예수님을 만나는 것보다 좋아하는 이성과의 만남이 훨씬 중요했다.
예배 시간보다 치장 준비시간이 훨씬 더 오래 걸렸다.
예배 시간에 늦을 것 같으면 한 겨울 수돗가에서 머리를 감는 고통도 불사했다.
아직 좋아하는 이성이 없는 나만
느긋해서 세수와 양치만 하고 깨끗한 옷만 입으면 엄마 손을 잡고 교회로 갔다.
엄마는 교회를 꼭 다녀야 나중에 죽어서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우리 식구 모두 천국에 가야 한다고
누구 하나 지옥에 있는 꼴은 차마 볼 수가 없다고 일요일 아침마다 늦잠 자는 나를 깨웠다.
천국행 티켓을 받기 위해 오빠와 언니들 모두 샬롬 선교원 출신이어야 했고
나도 그곳에 입학해야 한다고 했다.
엄마는 천국행 티켓을 이미 받은 양 말했다.
엄마는 교회에 다녀야만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했지만
경화 할머니도 샬롬 교회에 다니고 있었고
경화 할머니의 라이벌 지물포 할머니도 새벽 예배까지 참석하는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
두 할머니와 동네 사람들 몇몇을 봐도
교회에 다니는 것이 천국에 가는 것을 모두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고 나는 강하게 의심하고 있었다.
내가 동네에서 제일 좋아하는 안나 아줌마도 교회에 다니지 않았고
나를 보면 항상 먹을 것을 나눠주는 성희 언니는 성당에 다니고
말이 없는 민식이네 가족 모두 절에 다니고 있었다.
경화 할머니와 지물포 할머니가 천국에 계시다면
그곳은 천국이 아니고 지옥이기 때문에
나는 천국이 아닌 지옥에 가야겠다고
그러므로 나는 선교원에 다니지 않겠다고 했다.
엄마는 기가 차서 나를 쳐다보다가
경화네 대문을 한참 동안 바라보더니
천국에는 아무나 갈 수 없다고 하나님은 지혜로운 분이셔서
죽어서 하늘에 가면 커다란 체가 있어
믿음이 좋고 착하게 잘 산 사람은 체 위에 그대로 남아있고
교회만 다니지 남들에게 못되게 군 사람은 체 아래로 빠져 그대로 지옥에 간다고 했다.
그럼 경화 할머니는 체 위에 그대로 남는지 아니면 밑으로 빠져 지옥으로 떨어지는지
정확히 말해 달라고 그래야 내가 선교원에 갈지 결정하겠다고 하자
엄마는 한참 동안 난감한 표정을 짓더니
경화 할아버지는 천국에 계실 테지만 아무래도 할머니는 체 밑으로 빠질 것 같다고
이건 우리끼리만 알고 있자고 했다.
그 후로 나는 경화 할머니를 볼 때마다 할머니가 체 밑으로 빠져 떨어지는 상상을 하며
큭큭큭 웃어댔고 엄마는 내 옆구리를 쿡쿡쿡 찔러댔다.
아무튼 경화 할머니는 천국에 계실 확률이 낮으므로
우리 식구 모두 천국에 갈 테니 나도 선교원에 다녀야 한다는 엄마의 이상한 논리로 나는 그곳에 가야 했다.
선교원에 가자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아침 8시면 일어나서 등원 준비를 하고 9시 전에 도착해야 했다.
도착하자마자 기도를 하고, 찬송가를 부르고, 목사님의 설교나 전도사님의 성경 이야기를 듣고,
요일 별 활동 후 배고프지 않아도 점심을 먹고, 낮잠을 자야 했다.
벽에 붙여진 하루 일과표 그대로 하는 것이 나에게는 고역이었다.
가장 최악은 낮잠 자는 시간이었다.
나는 낮잠을 자기 싫어 항상 말똥말똥 깨어나 앉아 있었고
선생님은 나처럼 잠을 자기 싫어하거나 잠투정이 심해 다른 아이를 깨울 수 있는 아이들을
기도실로 데리고 가서 각자 하고 싶은 것을 하게 하셨다.
나는 항상 낮잠을 자지 않았고
김동주도 항상 깨어 있었다.
나는 항상 집에서 책을 가져와 읽고 있었는데
김동주도 자기 책을 가져오는 것이었다.
김동주가 가져온 책이 궁금해서 책을 슬쩍 보니
공룡그림과 과학 사진이 표지인 책이었다.
우리 집에는 전래동화나 위인전 세계명작동화 백과사전만 있었지.
그런 책들은 없었다.
김동주가 자리를 비운 사이 슬쩍 그 아이의 책을 보니
첫 장만 봐도 생생한 사진에 모험 이야기가 펼쳐져 다음 장을 넘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김동주가 돌아와 나를 흘끔 보더니
“ 너, 그 책 다 읽었으면 내 책이랑 바꿔볼래? 나도 니 책 궁금한데...... ” 하는 것이다.
“ 그래, 바꿔서 읽어보자. ”
우리 둘의 집도 마침 가까워서
김동주는 우리 집에 가끔 와서 자기 책을 돌려받기도 했고 내 책을 빌려가기도 했다.
반대로 내가 김동주네 집에 책을 빌리러 가기도 했다.
아줌마가 계시면 과일 먹으며 책을 보라고 마루로 올라오라고 하셨는데
마루 한쪽이 책으로 가득 찬 책장이었다.
책들을 보고 놀란 내가 과일을 먹다 책장으로 가자 김동주는
“ 너 보고 싶은 거 다 빌려가. 나는 이미 다 읽었어. ”
“ 어, 너 이 책들 다 읽었어? ”
“ 응, 난 다 읽었어. ”
“ 정말 이 책들 다 읽었어? ”
“ 응, 아빠랑 누나가 읽는 어려운 책들은 빼고 거의 다 읽었어. ”
그 책장에는 나한테 항상 빌려가던 전래동화도 명작동화도 모두 있었다.
그래도 김동주는 선교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면
매일 우리 집에 들러 내 책을 빌려가곤 했다.
길을 가다 동주 아줌마가 나를 불러 세웠다.
“ 현아야, 다음 주에 우리 동주 생일인데 저녁에 우리랑 같이 밥 먹자.
우리 동주가 너랑 같이 레스토랑에 가서 돈가스를 먹고 싶데.
아무래도 우리 동주가 너를 좋아하나 봐. ” 아줌마가 웃으며 말했다.
“ 네, 엄마한테 말해보고 허락하시면 갈게요. ”
“ 엄마가 이미 너 보낸다고 하셨으니 꼭 와라. ”
아줌마는 서둘러 시장 안으로 들어가셨다.
경화가 동주 아줌마를 보다 갑자기 나를 노려보더니 집으로 휙~ 돌아갔다.
같이 문방구에 가자고 자기가 나를 불렀으면서 말도 없이 집으로 갔다.
며칠 동안 아는 체를 안 하더니 어느 날은 대문을 열고 마루에 앉았다.
“ 현아야, 김동주 엄마가 너 다음 주 생일에 초대한 거
너는 아빠도 없는 불쌍한 아이라고 그래서 초대 한 거래.
너는 레스토랑에도 가 본 적이 없을 거라고
그래서 돈가스를 먹어 본 적이 없을 거라고 했다는 데. ”
“ 어? 내가 불쌍하다고? ”
“ 그래, 그래서 걔네 엄마가 시켜서 김동주가 너랑 책도 바꿔 보고,
너네 집도 가고 그런 거래.
걔는 싫다고 하는 데 걔네 엄마가 자꾸 시키나 봐.
그 아줌마 유치원 선생님이잖아. “
“ 어........ ”
“ 너 내가 한 말 비밀이다. 김동주한테 말하면 안 된다. ”
나는 짐짓 분한 마음이 일었다.
내가 불쌍하다고 동정받아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아빠는 금방 돌아오실 테니까
낮잠 자는 시간에 깨어있는 나에게 김동주가 다가왔다.
“ 현아야, 나랑 그 책 바꿔보자. ”
“ 싫어, 바꿔보기 싫어. ”
“ 어? 그럼 내가 다른 책 가져올까? ”
“ 아니, 싫어. 난 책 바꿔서 보는 거 싫어. ”
“ 그래, 알았어.
현아야, 다음 주 내 생일에 레스토랑 가기로 한 거
다음 주 수요일 오후 5시쯤 내가 데리러 갈 테니까........ “
“ 싫어, 안가. 내가 왜 니 생일에 너희 식구랑 밥을 먹으러 가니?
그리고 나도 돈가스 먹어 본 적 있어.
엄마가 집에서 많이 만들어 주셔. “
김동주가 멍하니 바라보다 제 자리로 돌아갔다,
한참 나를 보다 자기 책을 보기 시작했다.
집에 돌아와 손을 씻고 마루에 앉아 책을 보고 있는 데
김동주가 우리 집 대문을 두드렸다.
“ 현아야, 이 책 네가 좋아하는 라푼젤이야. 이거 너 가져. ”
“ 싫어, 너랑 책 바꿔 보기 싫어. ”
“ 바꿔보는 게 아니고, 너 이거 가져. ”
“ 싫어, 내가 거지도 아니고 왜 내가 네 걸 가져? ”
엄마가 당황해하며 동주에게 마루에 앉으라고 오른손을 들어 아래로 흔들었다.
“ 현아야, 동주한테 왜 그래?
동주 이리 와서 빵 같이 먹어라. “
“ 네 ” 동주가 마루에 앉으려고 신발을 벗는 데
“ 너, 너네 집 가. 그리고 다시 오지 마. ”
내가 책을 덮으면서 야멸차게 쏘아붙였다.
김동주는 무안한 지 얼굴이 벌게지다 신발을 다시 신고 대문으로 걸어갔다.
돌아보는 동주의 눈에 물기가 조금 보였지만
나는 보던 책을 다시 내려다보았다.
“ 현아, 너 왜 이렇게 동주한테 못되게 구니?
너 혼난다. 동주야, 현아가 오늘 몸이 안 좋은 지 자꾸 짜증을 내는구나.
다음에 다시 와서 놀아라. ”
그 이후로
다시는 내 옆에 오지 않았다. 한마디 말도 걸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 집에도 찾아오지 않았다.
선교원에 일주일쯤 더 다니다 엄마에게 나는
선교원에 다니면 자꾸 낮잠을 자야 한다고
혼자라도 좋으니 제발 집에 있게 해달라고 졸라댔다.
엄마도 더는 억지로 나를 보낼 수 없어
선교원에 보내지 않았다.
동네에서 마주쳐도 김동주는 나에게 알은체를 하지 않았고
나도 김동주를 못 본 체했다,
동네에서 아이들과 놀다가도
김동주가 내가 노는 무리로 들어와 놀려고 하면 나는 다른 무리로 가서 놀았고
그러면 나를 말없이 바라 볼뿐이었다.
그렇게 가을과 겨울이 지나니
내가 불쌍하다고 했던
나는 레스토랑에 가 본 적이 없어 돈가스를 먹어본 적이 없을 거라고 했다던
김동주를 향한 마음도 사라지고
점차 그 아이의 착한 마음을 어렴풋이 알아가던 시점이었다.
경화가 김동주의 손을 잡고 내 눈 앞에서 걸어가고 있었다.
나를 보더니 경화가 김동주의 귀에 귓속말을 한다.
김동주가 나를 보더니 멈칫 서다 파란 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갔다.
경화는 쌩하니 자기 집으로 들어갔다.
내 미미인형에 검은 칠을 한 후
나는 경화에게 절교 선언을 했고, 서로 말을 하지 않았다.
‘ 네가 좋아하는 아이가 김동주라는 거지..... ’
그날 밤 나는 엄마에게 선교원에 다시 보내 달라고 했다.
예수님이 잃어버린 양을 드디어 다시 찾았다고
엄마는 감사기도를 한 후
내일 당장 선교원으로 가자고 했다. 나는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었다.
‘ 먹이를 노려보며 하루를 기다리는 하이에나처럼 나는 복수할 기회를 반드시 잡을 거야.
내가 김동주를 빼앗아야지. 경화가 좋아하는 김동주를 빼앗아야지. ‘
다음 날 아침 엄마가 깨우지 않아도
나는 일찍 일어나 언니에게 머리를 감겨달라고 하고
좋은 냄새가 나는 로션을 얼굴과 손에 듬뿍 발랐다.
그리고 곰 인형이 달린 귀여운 머리띠를 하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핑크색 투피스를 입고 엄마 손을 잡고 선교원으로 향했다.
엄마는 이게 웬일이냐며 드디어 내가 하나님의 딸이 되었다고
콧노래를 부르며 기뻐하셨다.
선생님은 내가 다시 돌아온 것을 몹시 뿌듯해하시며
믿음, 소망, 사랑 반 중 어느 반을 들어가고 싶냐고 했다.
김동주가 들어있는 반은 사랑 반
경화가 들어있는 반은 소망 반
“ 저는 사랑 반에 가고 싶어요.
믿음, 사랑, 소망 중에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하셨잖아요.
그러니 저는 사랑반에 가고 싶어요. ”
엄마와 사랑 반 선생님은 박수를 치며 나의 말에 감격해하셨다.
선생님 손을 잡고 교실로 들어가니
나를 본 김동주의 눈이 부엉이처럼 커지고
귀신을 본 것 마냥 놀래서 입도 벌어졌다.
나는 그 애를 못 본 것처럼 주위를 둘러보다 맨 뒤쪽 비어있는 책상에 앉았다.
김동주를 주시하며
그 애랑 친한 아이가 누구인지
쉬는 시간에 무엇을 하고 노는지
읽고 있는 책은 무엇인지 계속 살펴보고 있었다.
민지훈
찬송가를 부른 뒤
어떤 남자아이가 동주 옆으로 가서 딱지를 보여주며 자랑하고 있었다.
어떤 때는 동주가 그 아이에게 가서 팔씨름도 하고 놀았다.
둘이 단짝이 분명했다.
슬쩍 그 아이의 가방을 보니 이름이 민지훈이라고 써져 있었다.
쉬는 시간에 그 아이 옆으로 갔다.
“ 내 이름은 현아야, 넌 이름이 뭐야? ”
“ 어, 난 지훈이, 민지훈”
“ 민지훈, 나도 민 씨인데, 우리 친하게 지내자.
화장실이며 체육실 식당을 잘 모르는데 너 알려줄 수 있어? ” 하자
지훈이는 얼굴이 불그스레 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쉬는 시간마다 나를 데리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안내해주었다.
다 기억하고 있었지만 모르는 척 고마워하며 설명을 듣고 있었다.
지훈이는 친절하고 착한 아이였다.
동주의 의아한 시선이 나를 따라다닌다.
그 이후 지훈이는 나를 데리고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면서 내 손을 놓지 않았다.
“ 얼레리 꼴 래리, 얼라리 꼴라리, 지훈이랑 현아랑 사귄데요. 사귄데요. ”
아이들이 지훈이와 내 주위를 감싸고 놀리기 시작했다.
지훈이가 부끄러운지 고개를 숙였다.
차마 아니라고는 말하지 못하고 내 대답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 지훈이처럼 여자에게 친절한 남자를 사나이라고 한데.
나는 지훈이처럼 친절한 남자가 좋아.
지훈이 같은 남자가 사나이 중의 사나이야.
너희는 그냥 어린애야. “
책을 보던 동주가 고개를 들고 나를 봤다. 나는 고개를 휙 돌렸다.
“ 사나이? 사나이가 뭐야? 그게 뭐야?...... ”
내가 좋아하는 감정을 일찌감치 인정해버리자 흥미가 떨어진 아이들이 웅성거리며 자리로 돌아갔다.
수업이 끝나고 신발장에서 실내화를 넣고 구두로 갈아 신는데
동주가 나에게 왔다.
“ 현아야, 집에 같이 가자. 우리 집에 네가 좋아할 책 많아. 엄마가 새로 사주셨어.
너한테 주려고 했던 라푼젤 책도 그대로 있어. ”
‘ 아..... 너는 다 기억하고 있구나. ’ 가슴이 가시에 찔린 듯 따끔했다.
김동주는
내가 책을 좋아하는 것도
내가 좋아하는 라푼젤도
작년 일을 모두 다 기억하고 있었다.
단단했던 겨울 땅이 봄기운에 녹기 시작한다.
땅 속 안의 씨앗이 땅 위로 연한 연두색 떡 잎 두 장을 피울 듯하다.
경화를 향한 복수고 뭐고 다 잊히는 듯하다.
“ 그래, 같이 가자. 나도 같이 가자. ”
뒤에서 운동화를 신던 지훈이가 신이 나서 말한다.
나와 지훈이, 동주 셋이서 함께 복도를 걸어 나간다.
소망 반에서 경화가 나와 우리 반 복도로 뛰어온다.
나를 보고 놀란 경화가 동주를 향해 걸어갔다.
“ 동주야, 집에 같이 가자.
할머니가 교회 정문에서 기다리고 계셔.
제과점에 가서 빵 사주신대. 얼른 가자. “ 동주가 지훈이와 나를 보다
“ 어...... 알았어. 가자. ” 한다. 경화와 동주가 앞서 나간다.
떡 잎은 나오지 못했다.
조금만 더 힘을 내서
단단한 땅을 비집고 나왔으면 떡잎을 피울 수 있었을 텐데
다시 봄을 시샘하는 꽃 샘 추위를 이겨내지 못하고 땅을 뚫지 못했다.
떡잎은 한 동안 나오지 못할 듯하다.
이제 떡잎이 나오는 것을 기다리지도 않을 것이다.
다음 날 아침 동주는 내 자리로 와서 무엇인가 말하려고 했지만
나는 동주에게 눈 빛 한번 주지 않았고
하루 종일 냉담한 눈빛을 그 애에게 쏘아댔다.
가방을 정리하고 교실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 데
김동주가 내 앞으로 왔다.
“ 현아야, 너 나한테 화난 거 있어? 내가 잘못한 거 있어? ”
“ 아니, 없는 데. 왜? ”
“ 네가 나한테 뭔가 화가 난 것 같아서. 난 예전처럼 너랑 잘 지내고 싶어서 ”
“ 어, 그래. 근데 너 경화랑 친하지 않아?
너네 좋아하는 사이 아니야? 난 그런 줄 알았는데 “
“ 아니야, 경화랑 나랑 안 친해.
경화 할머니가 요새 경화가 친구가 없어서 힘들어한다고
우리 엄마한테 전화해서 나랑 선교원에 오고 갈 때 같이 다니라고 부탁했데.
그래서 같이 다닌 것뿐이야. “
“ 그래? 그런 거였어?
나는 네가 경화를 좋아하는 줄 알았어.
그래서 너랑 다시 친하게 지내려다가 그러지 않은 건데......
진짜 남자는
자기를 좋아하는 여자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자기는 좋아하지 않는다고 분명하게 말한데. 그게 남자래. “
“ 그게 무슨 말이야? ”
“ 글쎄, 나도 잘 몰라. 아무튼
어른 남자들은 그렇데. 어린이 말고 어른 남자. 나는 남자다운 남자가 좋아.
너는 어떻게 생각해? “
“ 어?....... ”
“ 김동주, 너는 경화랑 집으로 가. 나는 지훈이랑 집으로 갈 거야.
지훈아, 집에 가자. ”
“ 그래, 동주야 같이 가자. ”
“ 아니야, 동주는 우리랑 못 간데. 동주는 경화랑 다녀야 한데. ”
내가 지훈이의 손을 낚아채고 둘이서 집으로 갔다.
지훈이는 선교원 아래 동네
우리 집은 지훈이네 동네를 지나 육교를 건너 시장을 통과하면 나오는 동네.
지훈이는 항상 육교까지 나를 데려다주었다.
가끔 내 가방을 들어다 주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지훈이에게
“ 지훈아, 어른 남자는 자기보다 힘이 약한 여자를 도와주고 친절하게 행동한데.
그런 어른 남자 중에 최고의 남자를 사나이라고 한데.
너는 꼭 사나이 같아. “
“ 응? 내가? 사나이? 내가 사나이 같다고? ”
“ 맞아, 너는 사나이 중 사나이야. 멋진 사나이. ”
지훈이는 “ 사나이, 사나이 ” 내뱉으며 육교를 올라갔다.
나랑 지훈이가 앞서가고
경화랑 동주가 뒤에서 걸어갔다.
“ 어이~~ 사나이! 사나이 민지훈! ”
누군가 큰 소리로 지훈이를 부른다. 아마도 지훈이 엄마인 것 같았다.
“ 안녕하세요. ”
“ 엄마, 얘가 현아야. 현아도 나랑 같은 민 씨야. 현아 이쁘지? “
“ 어, 네가 현아구나. 그러네. 이쁘게 생겼네. 네가 지훈이랑 친하다며
우리 지훈이가 현아 니 얘기 집에서 많이 한다.
현아가 우리 지훈이한테 사나이라고 했다며
그 날부터 지훈이가 자기 이름 부르지 말고 사나이로 불러 달라고 한다.
그래서 우리 지훈이가 사나이가 됐지.
민지훈 사나이. 사나이 민지훈. “
갑자기 지훈이가 뽀빠이 시늉을 하며 알통을 보인다.
지훈이 엄마도 나도 그런 지훈이가 우스워 소리 내어 웃었다.
“ 안녕하세요. ”
“ 동주야, 동주 오랜 만이네.
요새 왜 이렇게 놀러 안 와? 매일 둘이 붙어 다니더니
어..... 동주 옆에 여자 친구 누구야? “
“ 안녕하세요. 저는 경화라고 해요. ”
“ 그래, 경화야 안녕. 어~ 동주, 너 그랬구나.
동주는 경화랑 친하고, 지훈이는 현아랑 친하고
두 사나이가 여자 친구랑 노느라고, 연애하느라고 바쁘셔서 사이가 뜸 해지셨구나.
진짜 사나이들은 애인이 생겨도 우정이 변하지 않는 건데. “
지훈이는 씩 웃으며 나를 쳐다봤고, 나도 지훈이를 보며 웃어댔다.
“ 아니에요, 경화는 내 여자 친구가 아니에요.
나는 경화를 좋아하지 않아요. 경화 할머니가 경화가 혼자라 외롭다고 선교원에 다니기 싫어한다고
우리 엄마한테 부탁해서 그래서 경화랑 같이 다닌 거예요.
내가 좋아하는 여자 친구는 따로 있어요. ”
갑자기 동주가 경화의 손을 놓고 우리 앞을 쌩하니 지나갔다.
“ 동주야, 동주야, 같이 가! 같이 가. 같이 가자. ”
사색이 된 경화가 울며불며 동주의 뒤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 어, 동주야, 동주야...... 내가 잘못 말했나?......”
아줌마가 지갑에서 이백 원을 주면서 가다가 아이스크림을 사 먹으라고 했다.
지훈이와 나는 슈퍼에 가서 쌍쌍바를 갈라 나누어 먹고
둘 다 좋아하는 노란색 아폴로를 샀다.
“ 현아야, 너 아폴로 절반 가져가. 나는 이것만 먹으면 돼. ”
“ 그래, 고마워. 지훈이 너는 친절해서 참 좋아. ”
지훈아, 경화는 동주를 좋아하나 보다.
쉬는 시간에 같이 놀거나 집에 같이 갈 친구들도 소망 반에 있을 텐데
왜 경화는 쉬는 시간마다 우리 반으로 오고
집에 갈 때도 동주만 저렇게 쫓아다녀? “
나는 승리감에 도취되어 지훈이에게 칭찬을 마구 퍼부어 댔다.
지훈이는 어깨를 으쓱하며 내가 없는 동안 선교원에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해주기 시작했다.
딱딱한 아폴로를 손바닥에 살살 비벼 녹여내
입으로 쪼~옥 빨아먹을 때
아무런 흔적 없이 깨끗이 빨아들였을 때의 쾌감.
그 쾌감보다 더 큰 짜릿함이 나를 보고 손짓하고 있었다.
“ 아..... 은영이....... 은영이가 있어. ”
“ 은영이? 은영이가 누구야? ”
“ 소망 반에 경화랑 다니는 여자 애 이름이 은영이야. ”
“ 은영이라면 선교원 옆 언덕에 사는 그 은영이? ”
“ 그래, 맞아. ”
은영이는 또래보다 늦된 아이였다.
지능은 또래보다 3살이 어린 4살이라고 했지만 착하고 순해서 아이들은 은영이와 잘 놀았다.
은영이 엄마도 은영이가 같은 나이의 아이와 어울리길 바랬다.
경화는 느린 아이를 좋아하지 않는다.
눈치가 빨라 경화의 욕심을 알아서 채워주는 아이들만 좋아했다.
은영이는 경화의 친구는 될 수 없는 아이다.
그런 은영이와 경화가 친구라면.......
은영이가 경화의 친구가 되어야 하는 이유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
나는 그 이유를 찾아야 한다.
그 이유는 분명 경화의 약점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