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나, 금희 따듯한 온찜질을 하는 게 좋은데 물 데워서 대야에 수건이랑 같이 가져다줘.
그리고 미지근한 마실 물도 좀 주고
금희야, 바로 누워봐. 여기를 좀 만져줘야 덜 아플 텐데.......
“ 오빠, 지금 수액도 잘 들어가고 있으니까 , 나 약만 주고 가요.
오빠가 있으면 편하게 쉴 수가 없어. 제발 가줘요. “
“ 넌 지금 환자니까 내 말만 들어. 나도 지금 의사로 있는 거야. ”
“ 민욱아 , 여기....... ”
아줌마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대야와 물컵을 가져다주었다.
“ 따듯한 물 좀 마시고 다시 누워봐.
누나, 금희 바로 누우면 명치 부위에 수건 올려놓고 계속 온찜질해줘야 해.
그리고 시계방향으로 계속 마사지해주고. “
“ 너는? 이제 가려고? ”
“ 가야지, 내가 없어야 금희가 편히 쉴 거야. ”
“ 약 먹고 잘 쉬어. 일어나면 내일 아침에 우리 병원으로 와.
누나네서 가까우니까 꼭 들려. 서울 가려면 와서 진찰받고 가야 해.
너 지금 몸 상태로는 버스 못 타. “
“ 알았어요. 내일 아침에 일어나서 갈게요. ”
“ 너, 내일 진료 보니? ”
“ 응, 내일 일어나는 데로 금희 데리고 와. 내일 김 선생 좀 나오라고 해야겠어,
김 선생이 위쪽은 잘 보니까. 애가 저렇게 말라비틀어져서.......
얼마나 속을 끓이고 살 길래 속 병이 다 들었을까? “
“ 니 걱정이나 해, 금희는 애가 넷이다. 너나 정신 차리고 장가나 가. ”
“ 알았어. 금희 밤새 잘 지켜봐. 나 갈게. ”
아저씨는 엄마랑 결혼하려고 했던 민욱 아저씨가 분명했다.
집에 간다고 했는 데 아저씨는 거실 소파에 계속 앉아서 엄마가 있는 방만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가만히 아저씨를 보다 인사를 했다.
“ 안녕하세요 ”
“ 네가 금희 막둥이 딸이구나. 안녕, 이름이 뭐야? ”
“ 현아예요. 민현아 ”
“ 그래, 현아 이름이 이쁘네. 엄마랑 둘이서 온 거지? ”
“ 네, 아저씨 우리 엄마 많이 아파요? ”
“ 아니야, 심하게 아프지는 않아. 그래도 내일 아침에 병원에 엄마 데리고 와야 한다.
현아 서울 집에 가려면 엄마 데리고 아저씨가 있는 병원으로 와야 해. “
“ 네 ”
“ 얼른 들어가서 자라. 시간이 늦었다.
아니야, 오늘은 언니 방에서 자는 게 좋겠다. 불도 켜놔야 하고, 밤새 소란스러워서 자기 힘들 거야. “
가자, 아저씨가 재워줄게. 침대에서 자. ”
아저씨는 나를 유진언니 방으로 데리고 가더니
내가 잠이 들 때까지 옆에 있어주겠다고 했다.
주황색 스탠드가 은은하게 아저씨 얼굴을 밝혀주고 있었다.
움푹 들어가고 쌍꺼풀이 있는 짙은 눈, 곧게 뻗은 코, 작고 또렷한 입술선
생김새는 엄마와 다르지만 왠지 아저씨와 엄마는 비슷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불빛에 비친 아저씨의 옆모습은 엄마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남매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 아저씨, 아저씨가 민욱 아저씨죠? ”
“ 네가 내 이름을 어떻게 알아? ”
“ 아까 낮에 엄마랑 아줌마랑 얘기하는 거 들었어요. ”
“ 그래, 그랬구나....... ”
“ 아저씨, 우리 아빠 알아요? ”
“ 응? 아주 오래전에 봤지 ”
“ 우리 아빠 키 대게 크대요. 덩치도 크고, 힘도 무지 세대요. ”
“ 그래? 현아 아빠는 키가 크구나. ”
“ 아저씨, 아빠는 지금 서울에 없지만 곧 돌아오실 거예요.
우리 큰 오빠도 키도 크고, 합기도도 잘해서 싸움도 잘해요.
큰 오빠가 우리 엄마를 지키고 있어요.
우리 엄마는 나를 두고 어디든 가지 않는다고 약속했어요. 우리 엄마는 약속 꼭 지켜요. “
“ 그래, 알아.
현아 엄마는 약속을 어기는 법이 없어. 아저씨도 잘 알아.
엄마 어디 안 가. 아저씨가 엄마 데리고 어디 안 갈 거니까 걱정 말고 얼른 자. “
나는 아저씨를 경계하다 어느새 잠이 들고 말았다.
엄마가 사라지는 꿈을 꾸다 놀래서 일어났을 때는 푸르스름한 새벽이 창 주위를 감싸고 있을 때였다.
화장실에 가려고 거실로 나와
다시 엄마 옆에서 자려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아줌마는 엄마 발채에서 잠들어 있고, 엄마 배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수건이 올려져 있었다.
아저씨는 내가 들어온지도 모르고 엄마 배위의 수건이 식지 않았는지 살펴보다 엄마의 얼굴을 보곤 했다.
“ 일어났니? 배고파? ”
“ 아니요. 배 안 고파요. 아저씨 이제 가세요. 우리 엄마 옆에 내가 있을 거예요. ”
“ 그래, 아저씨 갈 테니까 수건 만져보고 차가워지면 엄마 배 위에서 내려놔야 해.
그리고 너도 엄마 옆에서 한 숨 자. “
“ 네, 아저씨도 얼른 가서 주무세요. ”
아저씨는 가방에 청진기며 물건들을 주섬주섬 챙겨 방을 나가셨다.
이번에는 진짜 가는지 신발을 신고 나가는 모습까지 확인했다.
아저씨가 나가자 나는 안심하며 엄마 옆에서 잠이 들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하얀 아침이 되어 있었다.
엄마는 한 결 나아져서 아줌마가 끓여 놓은 쇠고기 죽을 먹고 있었다.
“ 엄마 괜찮아? 걱정했잖아. ”
“ 괜찮아. 이제 다 나았어. ”
“ 엄마, 아저씨가 엄마 데리고 병원 오라고 했는 데 ”
“ 아니야, 안 가도 돼. ”
“ 금희야. 오늘 토요일이라 동네 병원은 다 닫고 민욱이네 병원만 열었을 거야. 대학병원은 너무 멀어.
너 지금 버스 안 타는 게 좋아. 기장도 오늘 가지 말고
내일까지 푹 쉬고 다음 주 월요일이나 몸 좀 회복하면 내려가. “
“ 아니에요, 언니 오늘 가야죠. ”
“ 엄마, 아저씨 병원에 가자. 갔다가 아저씨가 괜찮다고 하면 그때 가자.
저번처럼 또 길에서 쓰러지면 어떻게 해? “
“ 너 길에서도 쓰러졌니? 도대체 몸이 성한 데가 있어야지....... ”
“ 빈혈기가 있어서 그래요. 이제 잘 먹어서 빈혈은 없어졌어요.
그래, 그럼 현아도 아줌마가 주시는 죽 같이 먹고 병원에 가자. “
“ 응 ”
아저씨가 일하고 있는 병원은 시내에서 제법 큰 병원이었다.
키가 큰 5층 건물에 1층에는 소아과 산부인과 내과 외과 이비인후과 우리 동네 병원보다 훨씬 많고
의사며 간호사, 환자와 사람들이 바글바글 했다.
엄마는 들어가자마자 접수처에 이름을 말했다.
“ 이름은 김금희 주민등록 번호는......... ”
“ 아 네, 과장님한테 얘기 들었어요.
과장님 오늘 진료 없는 날인데 각별하신가 봐요. 따라오세요. “
간호사 언니가 엄마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우리를 복도 오른쪽으로 데리고 갔다.
“ 똑똑 “ 진료실 문을 두드린다.
“ 과장님, 김금희 환자 오셨어요. ”
“ 그래요, 고마워요. ”
“ 오빠, 어제는 고마웠어요. 한 밤중에 놀랐을 텐데...... 미안해요. ”
“ 너 언제부터 그렇게 아팠니? 얼굴빛도 안 좋은 게 몸이 영 말이 아닌 것 같다. ”
“ 애 낳고 키우다 보면 아무래도 힘이 들죠.
고질병에요. 이 속병은...... 서울에서도 약 먹고 계속 병원 다니고 있어요. “
“ 그래, 그럼 이왕 온 김에 내가 여기 김 선생한테 말해 놨으니 진료 좀 보고 가자. ”
“ 아니에요, 그럴 필요 없어요. ”
“ 너 서울 내려가야 하지? 그러면 내 말 들어. 지금 이 상태로 갔다간 버스에서 또 쓰러질 거야.
딸도 있는 데 너 쓰러지면 얜 어떡하려고 그래? “
“ 엄마, 의사 선생님 말씀 들어. 나 엄마 쓰러지면 무서워. ”
“ 그래, 알았어. 알았어요. 오빠. ”
“ 내가 다 말했으니까 간호사 따라서 김 선생 방으로 들어가고
김 선생이 하자는 검사는 다 받아. 내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검사는 다 신청해놨어.
시간이 걸릴 테니까
내가 현아는 누나 게 집에 데려다줄게. 그래도 괜찮지? “
“ 그래요, 오빠 고마워요. ”
아저씨는 내 손을 잡고 아줌마 집으로 갔다.
“ 현아라고 했지? 현아야, 아줌마 어제 잠을 못 자서 피곤할 텐데......
아마 집에서 계속 주무실지도 몰라. 현아도 졸리니? “
“ 아니요, 전 안 졸린데요. ”
“ 그럼, 너 아저씨랑 시장 구경 갈래? ”
“ 엄마한테는 집에 간다고 했잖아요? ”
“ 괜찮아. 엄마가 병원에서 나올 때쯤이면 우리가 병원으로 가면 되잖아. ”
“ 네...... 좋아요. 그럼 저도 갈래요. ”
아저씨는 내 손을 잡더니 연두색 택시를 타고 큰 시장으로 데리고 갔다.
우리 동네보다 열 배는 더 큰 시장이었다.
천장이며 벽면에 가방만 매달린 가게로 들어갔다.
“ 현아야 너 몇 살이지? ”
“ 7살, 내년에 학교 들어가요. ”
“ 그래, 그렇구나...... 아저씨가 현아 책가방이랑 필요한 물건 좀 사주면 안 될까? ”
“ 엄마가 싫어할 텐데....... ”
“ 아저씨가 엄마한테 잘 말할게. 그리고 엄마랑 아저씨랑 친해서 너 혼 안 낼 거야. ”
“ 그런데 그거 들고 서울에 어떻게 가요? ”
“ 아저씨가 소포로 서울 집까지 보내줄게. 그러면 우체부 아저씨가 집으로 가져다주실 거야. ”
“ 네. ”
“ 여기서 마음에 드는 거 다 골라. 알았지? ”
가방 가게를 나오자 다른 가게로 들어갔다.
대구의 문방구는 우리 동네 학교 앞 문방구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내가 좋아하는 만화 주인공 물건들이 언덕처럼 쌓여 있었다.
“ 엄마랑 너랑 내년에 학교 갈 준비물 사러 다니려면 엄마가 힘드니까 오늘 다 준비해서 가자. “
책가방, 실내화 주머니는 요술공주 밍키로
자동 필통과 연필, 색연필, 크레파스, 스케치북, 공책은 코난과 은하철도 999 세트로
모두 내가 좋아하는 만화 캐릭터 학용품들로 골랐다.
분명 엄마였으면 사주지 않았을 그러나 내가 갖고 싶어 했던 물건들이었다.
“ 아저씨가 현아 옷도 사주고 싶은데...... 몇 벌만 사자. ”
“ 네? 옷 두요? 여기서 더 사요? ”
“ 응, 아저씨 돈 많아. 그래서 현아 옷도 좀 사주고 싶어.
현아는 치마 좋아하니? 아님 바지 좋아하니? ”
“ 저는 치마 좋아해요. 원피스도 좋아하고 투피스도 좋아해요. ”
“ 그래, 저기 큰 아동복 가게로 가자. 조카들 옷 사줄 때 가던 곳이야. 예쁜 옷이 많아. ”
아저씨는 원피스에 투피스, 디스코 바지, 구두, 운동화. 그리고 가장 마음에 드는 밍키 손가방까지 다 사주였다.
아저씨 혼자 들을 수 없을 정도여서 나도 옷이랑 신발 가방은 들어야 했다.
집에 가면 작은 언니가 놀라고 질투할 모습이 눈에 선하게 그려져 얼른 집에 가서 자랑하고 싶어 졌다.
“ 배 안 고파? 뭐 먹고 싶어? ”
“ 아저씨 돈가스요. 돈가스랑 파르페 먹고 싶어요. ”
“ 그래 아저씨가 제일 맛있는 곳으로 데려 갈게.
여기가 대구에서 제일 맛있는 집이야. ”
우리는 아마데우스라는 간판이 달려있는 경양식 집으로 들어갔다.
노란 벽에는 모차르트의 사진들이 걸려 있었고
홀 중앙에는 하얀 블라우스에 검은색 치마를 입은 언니가 피아노로 잔잔한 클래식 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나는 돈가스, 아저씨는 오므라이스를 시켰다.
큰 오빠랑 현식오빠랑 죠스를 보고 먹은 돈가스 맛을 나는 잊을 수가 없었다.
달콤하니 부드럽고 독특한 소스
엄마가 해 준 것도 맛있었지만 왠지 경양식 집의 돈가스는 더 맛있는 것 같았다.
보자마자 입을 다물수 없었던 파르페
처음 먹어 본 파르페는 세상 그 어떤 아이스크림보다 맛있었고 화려했다.
아저씨가 같이 먹은 돈가스 고기는 더 두툼하고 연했으며 파르페는 생딸기와 메론이 초코랑 어우러져 상큼하고 진했다.
배도 부르고, 가방과 학용품을 보니 기분이 좋아 하늘을 날아갈 것 같았다.
오늘 산 원피스와 구두 책가방을 메고 얼른 학교에 가고 싶었다.
“ 현아야, 아빠 본 적 있어? ”
“ 어렸을 적에 본 적은 있는 데 사실 잘 기억은 안 나요. ”
“ 그래....... 큰오빠랑 언니들은 어때? 누굴 닮았니? ”
“ 큰오빠랑 큰 언니는 아빠 쪽을 닮았다고 하고, 작은 언니는 엄마를 닮았데요. ”
“ 그래? 그럼 너는? 너는 누구를 닮았데? ”
“ 어...... 저는..... 저는 누군가를 닮았겠죠. 뭐 아니어도 상관없어요. ”
“ 하하하하 그래, 맞아. 아저씨 눈에는 현아가 제일 이쁘고 귀엽다. ”
“ 친할머니랑 고모들도 자주 오시니? ”
“ 고모들은 이제 다 시집갔어요. 삼촌들도 장가갔고요. 집 근처에 큰 고모랑 할머니만 살아요.
저는 잘 모르는데. 큰 오빠랑 큰 언니는 할머니랑 고모들 오는 거 싫어해요.
오빠가 크게 한 번 대들고는 이제 잘 안 오세요.
우리 큰 오빠 화나면 무서워요. “
“ 그래, 다행이구나. 큰 오빠가 아빠 노릇을 해주네. ”
“ 아저씨, 우리 엄마 이쁘죠? ”
“ 어? 갑자기 왜? ”
“ 어제 엄마랑 아줌마 하는 얘기 들었는데 다는 아니고 조금만요.
아저씨가 우리 엄마 좋아했다고 들었어요.
지금도 우리 엄마 좋아해요? “
“ 응?...... 그래?........ 아저씨는 좀 바보 같은가 봐. ”
“ 왜요? ”
“ 너희 엄마가 우리 동네에 처음 왔을 때가 14살이었어. 아저씨는 대학생이었고
엄마는 초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우리 동네에 사는 친구를 찾아왔어.
고성 할머니가 초등학교를 안 보내줄 거라고 엄마는 짐작했어. 그래서 대구로 내려온 거야.
낮에는 일을 하고 돈을 모아 검정고시를 보고 대학에 가려고 했었거든.
엄마 친구가 아저씨 누나네 집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일을 그만두면서 너희 엄마가
친구 대신 집에서 일을 하게 됐어. 고성에서 계속 집안일을 해서인지 어려도 손이 참 야무졌데.
너는 엄마가 얼마나 예뻤는지 상상도 못 할 거야.
얼마나 예뻤는지 동네 총각들이며 사내아이들이 엄마한테 반해서 많이 쫓아다녔어.
아마 너희 아빠도 그랬을 거야.
아저씨도 누나네 집에 갔다가 엄마 보고 첫눈에 반했지.
그런데 아저씨는 엄마가 이쁜 것보다 엄마랑 말이 너무 잘 통했어.
점점 말을 할수록 알아갈수록 엄마가 특별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
현아 친한 친구 있어?
굳이 말 안 해도 눈빛만으로도 통하고 내 맘을 잘 알아주는 친구.
너희 엄마가 아저씨한테는 그랬어.
어느 날 밤
누나 집에 가보니 아무도 없는 주방에서 너희 엄마가 책을 보고 있는 거야.
그것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책을
아저씨는 태어나서부터 다리를 절었거든
그래서 친구들이랑 달리기도 축구도 하지 못했어.
항상 공부를 하고 책을 읽었지.
엄마랑 얘기하다 보니 둘 다 좋아하는 책도 작가도 비슷했어.
너희 엄마 꿈이 작가라는 것도 알게 됐지.
나이 차이가 8살이나 나는데도 어리다는 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속이 깊고 말이 잘 통했어.
엄마도 오빠처럼 나를 많이 따랐어.
나도 그런 금희가 기특해서 매일 밤마다 와서 공부를 가르치고 얘기를 나눴어.
총명하고 영특해서 공부를 잘하더라. 낮에는 일하고 아기 보느라 많이 힘들었을 텐데.......
아저씨가 내주는 숙제를 한 번도 안 한 적이 없었어.
한 겨울에는 찬 물에 기저귀를 빠느라 손이 동상에 걸려 퉁퉁 부어 있었어도 그 손으로 연필을 잡고,
글씨를 썼지.
아저씨가 엄마 손을 보다가 결심했어.
엄마가 조금 더 크면 결혼해서 대학교까지 공부시켜 꼭 작가가 되게 하려고 했어.
아저씨는 엄마가 참 좋았어.
예쁘기도 했지만 영특했고 꿈이 있었고 맑은 사람이었어.
엄마를 많이 좋아했어. 정말 많이 좋아했지.
금희가 점점 커가면서 아가씨가 돼 갈수록 아저씨는 엄마를 더 좋아하게 됐어.
“ 지금도요? 지금도 아저씨는 우리 엄마 좋아해요? ”
“ 아니, 아니야. 이제 시간이 많이 지났는 걸.
걱정하지 않아도 돼. 엄마는 현아나 언니 오빠 곁을 절대 떠나지 않을 거야.
너희 엄마는 절대 자식들을 버리고 갈 사람이 아니야. “
아저씨는 한참 동안 밖을 내다봤다.
“ 현아야. 수첩 꺼내봐. ” 아저씨는 수첩 맨 뒷장에 전화번호를 적었다.
“ 혹시라도 엄마가 아프거나 힘든 일이 있거나 아저씨가 도울 일이 있으면 이 번호로 전화해줄래.
엄마 모르게 말이야. “
“ 엄마 모르게요? ”
“ 응, 그래. 잘 가지고 있다가 대구에 놀러 오고 싶을 때나 집에 무슨 일이 생겨서 내 도움이 필요하면
아저씨한테 전화해. 아저씨가 서울로 갈게. “
“ 네. ”
“ 현아야....... 이제 가자. ”
아저씨와 나는 택시를 타고 아줌마 동네에서 내렸다.
택시에서 내린 곳은 어제 엄마랑 아줌마랑 같이 가서 빵을 먹었던 빵집 앞이었다.
“ 현아야, 여기 빵 참 맛있다. 들어가서 먹고 싶은 빵 고르자. 케이크도 맛있어. ”
“ 네, ”
내가 좋아하는 슈크림 빵, 아저씨는 단팥빵을 골라 아저씨와 창가에 앉아 빵을 먹었다.
“ 예전에 엄마가 내가 내준 숙제를 잘하거나 아저씨가 내 준 시험에서 백점을 맞으면
아저씨가 엄마를 데리고 와서 항상 빵을 사줬거든
엄마는 단팥빵이랑 호두과자를 좋아했어. 따끈한 우유랑 항상 같이 먹었지.
같이 이 자리에서 빵을 먹다가 교복을 입고 지나가는 소녀들을 볼 때면
엄마는 항상 부러운 듯이 한 참을 쳐다봤어.
많이 부러웠을 거야. 그 소녀들이 “
‘ 그랬구나....... 엄마가 그랬었구나....... ’ 갑자기 엄마가 보고 싶어 졌다.
“ 아저씨 이제 엄마한테 가요. 엄마 보고 싶어요. ”
“ 그래, 가자. 아저씨도 엄마가 보고 싶다. ”
아저씨와 나는 잔뜩 사놓은 짐을 아줌마네 집에 두고 엄마를 데리러 갔다.
“ 엄마 ”
“ 그래, 우리 딸. 오빠, 고마워요. ”
“ 아니야, 얼른 집에 가자. 이따 결과 나오면 내가 누나 집으로 가서 알려줄게. ”
“ 네 ”
엄마는 집에 가서 아저씨가 사 준 책가방과 신발 학용품 옷을 보더니
놀래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 현아야, 이게 다 뭐야? ”
“ 아저씨가 소포로 보내 준다고 했어. 나는 안 산다고 그랬는데 아저씨가 다 고른 거야.
다 사라고 억지로 그랬어. 나는 하나도 안 골랐어. “
“ 어휴...... 현아야. ”
점심으로 아저씨가 사놓으신 전복죽을 먹고 엄마는 다시 잠이 들었고 오후 내내 엄마는 잠만 잤다.
나는 아줌마랑 정원으로 나가 꽃들을 보고, 그네를 타고, 아줌마한테 어린 엄마 얘기를 들었다.
‘ 어린 엄마를 만나면 기분이 어떨까? ’
' 엄마가 나랑 친구였다면 우리도 친한 친구가 되었을까? '
점점 더 대구가 좋아졌다.
꽃과 나무가 많은 아줌마 집도, 아저씨도 마음에 들었으며
서울보다 어쩌면 대구에서 사는 게 더 재미있을 것도 같았다.
아줌마가 저녁에는 하얀 쌀에 분홍 새우가 얌전히 숨어 있는 죽을 만들어주셨다.
엄마랑 아줌마랑 죽을 다 먹고 정원에서 꽃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저씨가 초인종을 누르고 정원으로 들어오셨다.
“ 금희야 서울 언제 갈 거니? ”
“ 내일 기장에 갔다가 서울로 바로 갈 거예요. ”
“ 기장엘 꼭 가야 하니? ”
“ 네, 왜 그래요? ”
“ 아니야 ”
아저씨가 아줌마를 쳐다본다.
아줌마가 내 손을 잡더니 춥다고 갑자기 집 안으로 들어가자고 했다.
나는 아저씨와 엄마가 무슨 얘기를 할지 궁금해서 잔다고 말하고 언니 방으로 들어갔다.
언니 방은 정원 쪽으로 창이 나 있어서
엄마랑 아저씨도 보이고, 말하는 것도 들을 수 있었다.
엄마는 그네에
아저씨는 평상에 앉아있었다.
아저씨가 물끄러미 엄마를 쳐다봤다.
엄마는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 참 동안 아저씨와 엄마는 말이 없었다.
“ 금희야, 너 나랑 살래? ”
“ 오빠?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에요? ”
“ 내가 너희 아이들 다 잘 키워줄게. 나 벌어놓은 재산도 많아.
너 그 돈이면 애들하고 고생도 안 하고 편하게 먹고살 수 있어.
그래도 안 돼? ”
“ 오빠, 말이 되는 소리를 해요? ”
엄마는 화를 버럭 내더니 일어서서 집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 금희야, 나 아파. 나 이제 시간이 얼마 안 남았어.
나 일주일만이라도 한 달만이라도 너랑 한번 살아보고 싶어.
안될까? 금희야? “
엄마가 뒤돌아보더니 놀란 눈으로 아저씨를 바라봤다.
갑자기 손으로 얼굴을 감싸더니 엄마가 울기 시작했다.
아저씨도 엄마가 울자 따라 울기 시작했다.
엄마는 그네에 앉아
아저씨는 평상에 앉아
각각 따로 앉아 울기 시작했다.
누가 들을까? 부끄럽지도 않은 지 소리 내어 울었다.
나는 엄마와 아저씨가 우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언니 방 창문을 슬그머니 닫고 침대에 누웠다.
침대에 누워 잠이 들 때까지도 엄마와 아저씨의 울음은 그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