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비서, 이 학생이랑 할 얘기가 있으니 잠시 나가 있어. ”
" 네, 총장님 알겠습니다. “
“ 총장님, 학교에서 보니 많이 새롭네요. 매일 밤에만 보다 낮에 보니 색다른데요. ”
“ 미애야, 아니 화란아.
화란이라고 부를 게. 많이 놀랐어. 이 투서를 받고 말이야.
네가 우리 학교 학생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어,
왜 말하지 않았니? 미리 알았다면 좋았을 텐데. “
“ 모르는 게 더 나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세상에 우연히 벌어지는 일들은 많잖아요?
총장님이랑 내가 만난 것도 우연이니까.
이걸 악연이라고 해야 할까요? 아니면 필연이라고 해야 할까요? “
“ 투서에는 네가 더 이상 우리 학교에 다니지 않게 하라고 쓰여 있어.
만일 네가 계속 학교에 다니면 언론에 제보를 하겠다고 말이야.
이걸 보낸 사람이 누구인지. 혹시 짐작 가는 사람이 있니?
너한테 앙심을 품은 사람 같아. 한 번으로 그칠 것 같지가 않구나.
자퇴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퇴학 처분이란 기록이 없으니 취직을 할 때 문제가 안 생길 수도 있고,
계속 학교에 다닌다면 오히려 더 시끄러워져서 너한테 안 좋을 수도 있어.
소문이 일파만파 퍼지면 시간이 흘러도 취업할 때 어려워질 거야.
아주 작은 중소기업이나 장사를 하는 건 상관없겠지만
대기업이나 괜찮은 회사에 들어가기는 힘들 거야. “
“ 총장님, 아니 ‘ 민식 씨 ‘라고 부를까요?
총장님은 그렇게 불러 달라고 부탁하셨잖아요.
뭐라고 불러드릴까요? ”
“ 화란이 네가 편한 데로 불러. ”
“ 지금 이 상황 너무 재미있지 않아요?
어젯밤만 해도 총장님이 저에게 뭐라고 하셨죠?
다음 달에 독일에서 학회가 있으니 거기 같이 가자고 하셨죠.
나랑 같이 떠나면 행복할 것 같다고. 원하는 건 모든 다 들어주시겠다고 했는데
독일 학회에 같이 다녀올 테니 학교에 계속 다니게 해 달라면 어쩌시겠어요?
제가 업소를 그만둔다면 지방 캠퍼스에 아파트를 얻어서 같이 지내자고도 하셨잖아요.
사모님이랑은 같이 사는 게 재미없다고, 아이들 때문에 이혼하지 못해 사는 거라고
매일매일 지옥 같다고 하셨잖아요.
따님 혼사도 얼마 안 남고, 아드님 취직까지 모든 게 정리되면 같이 떠나자고 했으면서
이 투서 때문에 저보고 자퇴를 하라고요? 너무 심하지 않아요?
매일 밤 ‘ 사랑한다 ’ ‘ 모든 걸 다 버리고 너랑 떠날 수 있다. ’ 말했으면서
이제 나 혼자 책임을 지고 자퇴를 하라고요?
하하~ 너무 웃기지 않아요? 너무 재미나요.
모든 걸 버리겠단 사람이 아무것도 잃기 싫으니 나보고 떠나라고요?
다 거짓말이었나 봐요?
날 버리지 말아 달라고 무릎 꿇고 애원하던 그 남자가 총장님이 아니던가요? “
“ 화란아. 나는 지금 많이 괴로워.
어떻게 하는 것이 너를 위하는 것인지 한 참 생각했다.
자퇴는 내가 아닌 너를 위한 결정이야. 믿진 않겠지만
너를 사랑할 때 나는 진심이었어.
아니, 나는 지금도 너를 사랑한다. 화란아 “
“ 사랑이란 건 당신 입에 담아 둘 말은 아니네요. 우스워지네. 사랑이 ”
“ 만일 내가 다 버리겠다고 하면
아내랑 이혼도 하고, 아이들도 다 버리고 너랑 유럽으로 영영 떠나겠다고 하면
너 나랑 같이 갈래?
내 옆에 네가 있겠다고 하면 다 버릴 수 있어.
정말이야. 내 마지막 삶을 너랑 같이 보내고 싶어. “
“ 총장님은 자기 마음도 모르고 살고 있어요.
지금의 이 마음이 영원할 거라 믿어요?
내일 아침이면 이 말들을 뱉은 걸 후회하게 될 거예요.
아니, 이미 후회하고 있을지도 모르죠.
‘ 사랑한다 ‘ 는 말은 무서운 말이에요.
맹목적이고 단순한 말이라 지금 이 순간만을 생각하게 만들죠.
내일 당신의 말에는 또 다른 조건이, 단서가 붙을 거예요.
나 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생각나지 않을 때
그때 나를 사랑한다 말하세요.
그래도 내 사랑을 기대하지 마세요.
미안하지만 나는 총장님을 사랑하지 않아요.
이것저것 보이고, 저울질을 하고 있거든요.
난 나쁜 여자예요. 착한 척은 하고 싶지 않아요.
자, 총장님 지금 제가 적어드린 이 계좌로 3억을 넣으셔야 해요. 내일까지요.
만약 내일 저녁까지 입금이 안 되어있으면
이 투서, 제가 촬영해놓은 사진들과 동영상까지 모조리 함께 다 언론사로 갈 겁니다.
저는 뭐 이제 무서울 게 없어요.
이번 일이 터지면 아마 유명세를 타서 제 몸 값이 아주 많이 더 올라갈 거예요.
총장님, 아니 우리 민식 씨는 잃을 게 아주 많을 거예요.
돈이 뭐가 그렇게 중요하겠어요?
총장님한텐 이미 많은데.
나만 생각나면 나를 만나로 오세요.
이 돈은 저에게 보내는 이별 선물이라고 생각하세요.
저 때문에 아주 많이 즐거우셨으니까. “
“ 화란아,
너는 내 감정이 사랑이 아니라고 말하지만
이건 사랑이 맞아.
전엔 네가 말한 대로 난 그런 사람이었어.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
총장은 주머니에서 통장과 도장을 꺼냈다.
“ 이거 받아.
이 돈은 내가 너랑 살게 되면 새로운 삶을 시작할 돈이었어.
어차피 네 돈이고, 나는 필요 없으니 가져가라.
아무도 모르는 돈이니까 은행에 가서 네가 직접 찾아.
오늘이나 내일 가급적 빨리 찾는 게 좋을 것 같구나.
돈이 필요해서 그곳에서 일한다면 이제 그만둬.
그게 아니라면 내가 너에게 보내는 이별 선물이라 생각해도 좋고
너한테 줄 게 이것밖에 없구나.
고마웠어. 화란아.
너를 만나고 다시 사랑이란 감정을 느끼면서 나는 다시 태어난 것 같았어.
나는 많이 행복했다. 이제 그만. 다시는 보지 말자. “
총장은 화란에게 문을 열어 주었다.
“ 한 번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너를 안아보고 싶다. 괜찮니? ”
“ 네, 마지막 선물이에요. ”
화란은 총장을 안아주었다.
그의 몸이 ‘ 부르르 ’ 떨리며 낮게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오늘이 그의 마지막 모습일 수 있다고 화란은 생각했다.
그의 사랑은 젊고 예쁜 여자를 사랑한 늙은 남자의 탐욕으로 치부되었다.
그걸 그도 알고 있다.
자존심과 명예를 중요하게 여기는 남자이니 이번 일로 그는 큰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그가 어떤 결정을 하든 화란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 남자가 세상에서 사라진다고 해도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화란은 문을 열고 걸어 나갔다. 뒤돌아보지 않았다.
‘ 이제 끝난 일이니까.
이제 이 학교는 다시 올 일이 없겠지. 졸업은 하고 싶었는데 ‘
행정실에 들려 자퇴서를 내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화란은 은행에 들러 총장의 돈을 자신의 통장에 이체했다.
“ 강화란 님, 통장 두 개 모두 고객님 명의인데 그래도 이체를 하시겠어요?
둘 다 입출금 통장인데요. “
“ 네? 두 개 다 제 이름인가요? ”
“ 네, 통장, 도장 모두 강화란 님 명의예요. ”
“ 네, 옮겨주세요. ”
“ 그럼. 입금되어 있는 10억 모두 이체하겠습니다. ”
“ 10억 이라고요? ”
“ 네, 확인해보시겠어요? ”
“ 아니에요. 그대로 이체해주세요. ”
윤 총장의 말은 사실이었다. 화란은 통장을 한 참 동안 바라보다 집으로 향했다.
죄책감은 느끼지 않았다.
그런 감정은 화란에게 사라진 지 이미 오래였으니까
초저녁 화란은 주현우를 찾아갔다.
화란의 대학교에 투서를 보낸 사람을 찾아야 한다.
학생은 아닐 것이고 분명 화란에게 악감정이 있는 누군가일 것이다.
“ 사장님, 누가 내가 다니는 대학교에 이걸 보냈어요. ”
“ 이게 뭐야? ”
“ 낮에 자퇴서를 내고 오는 길이에요. 아무래도 자퇴서로 마무리되지 않을 거예요.
계속 나를 지켜볼 텐데. 찾아야 해요. 이걸 보낸 사람이 누군지. “
“ 등기로 왔나? ”
“ 아니요, 퀵서비스로 왔데요. ”
“ 찾기가 쉽지 않을 거야. 내가 일단 알아볼게.
학교에 가질 않으니 시간이 이제 많겠네. 차라리 잘됐어. “
“ 아니요. 빚은 다 갚았으니까 이제 여긴 그만 둘 게요.
원중만 전무한테 집중할 거예요. 할 일이 많아요. “
“ AGT 건설의 전무 원중만? 왜?
한 달만 더 일해. 갑자기 그만두면 어떡해?
나는 어떻게 먹고살라고? 너를 찾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
“ 그건 사장님이 알아서 할 일이에요. 돈은 충분히 벌어 들였잖아요.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은 다 했어요.
이 투서 누가 보냈는지 알아봐 주세요. 사례는 충분히 할 테니
아시죠? 우리가 원하는 걸 얻으려면 서로가 필요할 거예요. ”
화란은 집으로 돌아가 오랜만에 푹 잤다.
“ 엄마, 나 이 집을 나갈 거야. 엄마도 이 집에서 일하지 않아도 돼.
내가 엄마한테 그만한 돈은 줄 수 있어.
어떡할래? 같이 나갈래? 난 오늘 부동산에 가서 나가서 살 집을 계약할 거야.
내가 이모 집 근처로 엄마가 살 집을 마련해 줄 수 있어. ”
“ 갑자기 네가 무슨 돈이 생겼어? 아직 빚도 남았는데. “
“ 내가 빚은 다 갚았어. 돈이 어디서 생겼냐는 질문은 하지 마. ”
“ 빚을 다 갚았다고? 화란아. 미안해서 내가 할 말이 없다. 너한테.
그래, 나가자. 나도 더 이상 이 집에서 살기 싫다. “
“ 응, 오늘 다른 사람 구하라고 사모님께 말씀드려.
내가 이모 집 근처로 집 얻어놓을 게. “
점심시간이 시작되기 전에 화란은 원중만이 있는 AGT 건설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