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20. 씹던 껌 이었던 나

by 옥상 소설가

“ 선생님, 중학교에 입학식에 신애가 신입생을 대표해서 입학 선서를 하게 될 거예요.

그건 어쩔 수 없지만 중간고사는 내가 꼭 전교 1등을 해야 돼요.

압도적인 점수차로 말이에요. “

“ 지금 이대로라면 넌 충분히 그럴 수 있어. ”

“ 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준비는 해야 할 것 같아서요. ”

“ 그래, 알았다. ”

“ 요새 강우 오빠나 신애는 어때요? ”

“ 신애는 열심히 하고 있고, 강우가 좀 이상하네.

항상 앞만 보고 달리던 애였는데. 요즘 정신이 어디 팔린 애 같아.

숙제도 잘 안 해놓고, 가끔 멍하니 생각할 때가 있어. “

“ 그럴 거예요. 지금이 그럴 때죠. ”

“ 그게 무슨 말이야? ”

“ 사춘기의 남자애가 첫사랑에 빠지면 정신 차리기 힘들 거예요.

지금은 아무 말도 들리고, 보이지 않을 거예요. “

“ 연우야. 나이가 오십은 넘은 사람처럼 얘기한다. 너 ”

“ 이제 3월이니까 주 3회로 오시면 될 것 같아요.

중학교 수업은 거의 다 정리됐으니 다음 주부터 고등학교 수업으로 들어가죠. “

“ 그래, 그러자. 너 가르치는 일이 요즘 내 낙이다. ”



***************


화란은 짐을 싸서 인사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한 참 후에야 말자는 화란이 나간 것을 알고 인사도 없이 나갔다고 욕을 했다.

영자는 화란이 휴학을 하고 시골에 있는 할머니 댁에 잠시 내려갔다고 했다.

몇 달이 지나도 화란은 돌아오지 않았고 영자도 말자의 집을 나갔다.

강남에 아파트를 장만한 화란은 강우에게 아파트 키를 주었다.

강우는 매일 화란의 아파트를 방문했고 둘만의 밀회는 계속되었다.

새 학기가 시작되었지만 강우는 화란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화란과 함께하는 시간들은 바람같이 지나갔다.

“ 최 이사님 댁 강우군 어쩌려고 저럴까요? ”

“ 여전해요? ”

“ 네, 벌써 일주일째 집에 안 들어가고 있어요.

사모님이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최 이사님은 아마 눈치채셨을 거예요. ”

“ 알아서 잘하겠죠. 자기들 인생인데. ”

“ 강화란은 원중만과 무슨 관계예요? ”


“ 저도 처음엔 스폰이나 깊은 관계인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닌 거 같아요.

AGT 건설에서 그동안 공들여서 따내려고 했던 계약들을

강화란이 체결해내면서 회사 내 수익도 증가하고 원 전무의 입지도 강해지고 있어요.

그 여자 나이도 어린데 로비스트로도 탁월하다고 해요.

원중만 전무가 분명 깊은 관계를 요구했을 텐데

거절하고 로비스트, 비즈니스 파트너로만 일하는 것 같아요.

계약을 체결하면 인센티브도 받고요. “

안 좋은 소식은

전에 강화란이랑 깊은 관계였던 재경대학교 윤민식 총장 얼마전 자살했다고 하네요. “


“ 네? 자살을요? ”

“ 대학교에 소문이 돌았데요.

혼담이 오가던 따님 혼사도 깨지고, 윤총장 아내분이 이혼을 요구했고요. “

“ 강화란도 알고 있어요? ”

“ 네, 알고 있는데 평상시랑 같아요. 별 반응이 없어요. ”

“ 그럴 거예요. 그 여자는. 정 비서님 고생했어요. “

“ 네, 또 필요하신 거 있으면 말씀하세요. ”

“ 고마워요. ”


연우는 정 비서와 1층 거실로 내려갔다.


“ 사모님, 저는 이만 회사로 가보겠습니다. ”

“ 정 비서가 요즘 우리 딸이랑 친하게 지내나 보네. 잘 가요. ”

“ 네, 사모님 감기 조심하시고요. ”



“ 연우야, 우리 연우 입학식 선물로 뭘 사줄까? 필요한 거 있니? ”

“ 아니, 그런 거 없어. ”

“ 그래도 엄마가 우리 연우한테 뭘 좀 해줘야지. ”

“ 그럼 엄마, 나 부탁이 하나 있는 데. ”

“ 그게 뭔데? ”

“ 엄마, 중학교에 입학하면 학부모 운영위원회를 모집할 거야.

엄마가 거기 들어가면 좋겠어. “

“ 어? 연우야. 엄마는 그런 거 싫은데.

난 사람들 앞에 나서는 거 질색이야. “

“ 엄마, 나를 위해서 나간다고 생각하면 안 될까?

그러면서 사람들도 좀 사귀고. 말자 아줌마만 만나지 말고

여러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좋은 인연도 만들어지니까 “


“ 글쎄, 한번 생각해 볼게. ”

“ 너는 어때? ”

“ 뭐가? ”

“ 선생님이 아주 잘하고 있다는데. 이미 중학교 과정은 거의 다 끝났다고 하던데. ”

“ 응 다음 주부터는 고등학교 내용이 들어가.

계속 공부하고 있어. 재미있네. 공부하는 게. “

“ 엄마, 잘 생각해봐.

말자 아줌마랑 한 동네에서 자라고 시간을 오래 보냈어도 친구가 아닐 수 있어.

세상에 좋은 사람은 얼마든지 많아.

돈이 많은 강윤희가 아닌 여자 강윤희를 존중해주는 사람을 만나.

나 중학교 입학하면 다른 아줌마들 한 번 만나봐. “

“ 그래, 알았어. ”


****************


3월이 시작되었다. 연우는 신애와 다른 반이 되었다.

새 학기가 시작되었지만 연우는 교탁 앞 맨 앞자리에 앉아 수업만 듣고, 책을 보거나 공부만 했다.

연우가 친구를 사귈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여자 아이 몇 명이 먼저 와서 인사를 했지만 연우는 간단히 인사를 하거나 대화만 나누고 자기 일만 했다.

반가워하지도 않고, 관심을 보이지도 않자 아이들은 연우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연우는 한 시간도 허투루 보낼 수가 없었다.

연우의 바로 뒤 편에서 여자아이들 대여섯 명이 모여 연우에 대해 얘기를 하고 있었다.

“ 쟤는 뭔데 맨날 혼자 앉아서 공부만 해? ”

“ 쟤가 솔빛 초등학교 공식 왕따 우연 우잖아. ”

“ 우연우? 솔빛 초등학교 시절 내내 왕따였다는 애? ”

“ 나도 친구한테 들었어. 쟤 아버지가 무슨 건설회사 사장인데 딸은 완전 찐따라고 하던데. “

“ 아빠가 사장이면 뭐해, 딸은 이상한데. ”

“ 너도 들었구나. 신애가 쟤 불쌍한 애라고 잘 챙겨주라고 하더라.

신애 걔는 왜 그렇게 착해 빠졌는지, 초등학교 때 신애만 쟤를 챙겨줬다고 하던데. “


“ 그러게 신애는 공부도 잘하고, 성격도 좋고, 정말 모범생이지. ”

“ 근데 쟤 신애랑 친한 것 같지 않던데. 신애는 쟤 챙겨주려고 가끔 우리 반에 오긴 하는데

우연우는 신애랑 말도 섞고 싶지 않아 하던데.

왠 잘난 척이야. 왕따 주제에.

“ 내버려두어. 저러다 죽게. ”

“ 저런 애를 왜 챙겨줘? 신애 걔 참 속도 없다. 착하기만 해서 “

” 그러게 나 같으면 아는 척도 안 하겠다. 저런 애랑 “

“ 내 욕을 하려면 내 귀에 안 들리게 해 줄래? 아니면 내 앞에서 말하던가. ”

연우가 고개를 돌려 아이들에게 차분히 말했다.


“ 뭐? 우리가 무슨 니 얘기를 했다고 그래. 이상한 애네. ”

“ 그러게, 네가 솔빛 초등학교 왕따였다며? 공부도 거의 꼴찌였다고 하던데. ”

“ 그래서? 무슨 상관이야? 너희랑 ”

“ 우리가 하지도 않은 말을 했다고 네가 그러잖아.

너 참 이상한 애다. ”

신애는 어느새 연우의 반으로 들어와 연우 자리 옆에 서있었다.


“ 너희들이 연우 얘기를 한 건 사실이잖아.

뒤에서 친구 얘기를 하는 건 좋은 일은 아니지. 했으면 사과하면 되고. ”

“ 어? 신애야, 언제 왔어? 아니, 그게 사실은......

그래, 미안하다. 우연우 ”

“ 우리 연우 왕따 아니었어. 소문만 그렇게 난 거지.

그러니까 너희들이 좀 잘해줘. 알고 보면 괜찮아. 우리 연우 “

“ 어휴, 신애 너는 착하기만 해서

너한테 인사도 안 하고, 아는 척도 안 하는 애 편을 왜 들어줘?

속도 없다. 속도 없어, 야 우리 매점이나 갔다 오자. “


아이들은 뒷문으로 나가 복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 연우야, 한 반 친구들인데 좀 친하게 지내봐.

초등학교 때처럼 내내 혼자 지낼 거야?

네가 먼저 말도 좀 걸어보고. “

“ 넌 니 일이나 신경 쓰지 그래.

언제까지 내 주위를 어슬렁 거릴 거야? ”

“ 난 네가 걱정돼서 그러지. ”

“ 그런 걱정 필요 없으니까 니 걱정이나 해.

집에 안 들어오는 너네 오빠 걱정을 하던가. ”


“ 너, 너, 그걸 어떻게 알아?

우리 오빠 집에 안 들어오는 거. ”

“ 넌 내가 아무것도 모를 것 같니?

내가 여전히 바보일 것 같아?

내 걱정하는 척 말고 너네 오빠나 찾아.

아니 강화란을 찾아.

그게 더 빠를 거야. 너희 엄마한테 전해.

AGT 건설에서 일하고 있는 강화란을 찾으면

너희 오빠를 찾을 수 있을 거야. “

“ 너 도대체 어떻게? 어떻게? ”


더 이상 신애에게 당하고 사는 연우가 아니었다.

신애는 초등학교 시절 내내 연우를 위하는 척하면서 반 아이들이 연우를 싫어하도록 만들었다.

연우가 왕따가 되어 친구들을 사귈 수 없도록 만든 것도

신애가 학용품이나 비싼 물건으로 매수한 신애의 친구들이었다.

그걸 몰랐던 연우는 되려 신애만 자기를 위한다고 강아지처럼 신애만 졸졸 따라다녔다.

신애에게 연우는 단물이 다 빠져버린 껌

책상에 붙였다 떼었다 씹는 껌 같은 아이였다.


우둔했던 연우가 어떻게 오빠와 화란이 깊은 관계인 것을 알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강우가 집에 들어오지 않자 최 이사는 사람을 시켜 강우의 행적을 찾았고

화란이 사는 APT에 강우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최 이사는 강우가 그렇게 된 것이 엄마 말자의 탓이라며 당장 강우를 데려오라고 했다

말자가 화란의 집을 몇 번이나 찾아가 강우를 만났지만

강우는 계속 화란의 집에 찾아오면 고등학교를 자퇴하겠다는 협박을 했고

그렇게라도 고등학교를 다니는 게 좋겠다고 결정한 말자와 최 이사는 강우를 그대로 두었다.

엄마가 신애에게 말해주지 않은 것을 어떻게 연우가 알고 있는 것일까?

신애는 더 이상 연우가 그 전의 연우가 아니라는 것을 서서히 깨달아 갔다.


“ 엄마, 오빠가 화란 언니 집에서 살고 있는 거야? ”

“ 너 그걸 어떻게 알았어? 누구한테 들었어? ”

“ 연우가 그러던데. 강우 오빠가 화란이랑 같이 있다고.

정말 연우 말이 맞아? “

“ 걔가 그걸 어떻게 알았지? ”

말자는 연우가 강우와 화란의 관계를 알고 있는 것에 당황했다.

이제 더 이상 강우와 화란의 관계를 방관할 수는 없었다.


“ 여보, 연우가 강우가 화란이랑 같이 있는 걸 알았어요. 어떡해요? “

“ 뭐? 그걸 어떻게 알아? ”

“ 오늘 학교에서 연우가 신애한테 그러더래요.

혹시 윤희나 연우 아빠도 알고 있는 거 아니에요. 그러면서도 모르는 척하고 있는 건가? “

“ 그러게. 애를 잘 키웠어야지. 집에 맨날 있으면서.

듣기 싫어. 끊어 ”


강석은 화를 내며 전화를 끊었다.

‘ 연우가 알고 있다면 민우나 연우 엄마도 알고 있다는 소린데

어떻게 알아냈을까? 비서실에 알아보라고 시킨 건가?

그랬으면 비서실장이 나한테 언질을 줬을 텐데. 이상하네.

화란이랑 강우를 떨어뜨려 놔야겠네.

더 이상은 안 되겠어. ‘


최 이사는 강우와 화란을 떼어놓을 방법을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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