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를 넘어 근원의 소리를 빚다

정가 정마리 <Kairos, 소리의 층위> [공연]

by So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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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결, 직물, 그리고 목소리의 '결'


우리 삶의 흔적을 이루는 '결'은 표면의 무늬인 동시에 그 안에 시간과 경험을 겹겹이 쌓아 올린 고유한 지문이다. 한국음악의 지금을 만나는 축제, 수림뉴웨이브 2025에서 세 번째 주인공으로 무대에 오른 정가 정마리 아티스트는, 지난 2025년 10월 30일 우리를 낯설면서도 지극히 근원적인 소리의 세계로 깊이 빠져들게 했다.


우리가 김희수아트센터 SPACE1에서 마주한 《Kairos, 소리의 층위》 무대는 단순히 동서양의 옛 노래를 나열하는 공연이 아니었다. 그것은 한국 전통 성악인 정가(正歌)와 서양 고음악의 뿌리인 그레고리오 성가(Gregorian Chant)를, 오직 아티스트 한 사람의 무반주(아카펠라) 목소리로 엮어내는 경계 허물기의 선언이었다. 국악 관현악을 벗어난 무반주 가곡과 가장 오래된 기록음악이 한 무대에서 만났을 때, 그 소리의 층위 속에서 우리는 인류가 오랫동안 잊고 있던 '인간 근원의 목소리'에 대한 질문과 마주하며 숭고한 침묵 속에 잠겨들 수밖에 없었다.


정마리라는 예술가가 지나온 시간과 그 깊은 탐구의 '결'이 고스란히 응축된 60분. 우리는 그날, 동서양의 시공간을 초월한 소리를 통해 우리 모두의 내면에 잠재된 가장 순수한 소리의 '결'을 마주하는 잊을 수 없는 경험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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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의 뿌리를 찾는 여정


아티스트 정마리는 한국 전통 성악 중 가장 정제된 노래인 정가(正歌)를 깊이 연구하는 전통의 계승자다. 동시에, 서양에서 가장 오래된 노래인 그레고리오 성가를 탐구하는 치열한 탐험가이기도 하다. 그녀의 모든 예술 활동은 "인간이 가진 가장 근본적인 목소리는 무엇일까?"라는 하나의 질문에서 시작된다. 정마리가 국악 반주가 일반적인 가곡을 무반주라는 자신만의 길로 개척하고, 이질적인 서양 성가와 결합한 이유도 바로 이 근원적인 소리를 찾기 위함이다.


이러한 예술 철학은 그녀가 이끄는 Jungmarie Company의 모토인 "경계에서 중심을 보고 중심에서 경계를 생각한다"는 문장에 잘 담겨 있다. 정마리에게 '정가'는 흔들리지 않는 중심이자 인간 본연의 소리를 찾는 나침반이 된다. 그리고 이 단단한 중심 덕분에, 무용, 연극, 미술 등 여러 장르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실험할 용기를 얻는다. 이처럼 깊고 단단한 탐구의 '결'이 있었기에, 우리는 그날 정마리의 목소리를 통해 시대와 문화를 허무는 특별한 순간을 경험할 수 있었다.




소리의 근원을 이루는 두 개의 기둥


여기서 잠시, 정마리가 탐구한 두 개의 기둥, 정가와 그레고리오 성가에 대해 짚어볼 필요가 있다.


정가(正歌)는 '바른 노래'라는 뜻 그대로, 조선시대 지식인(사대부)들이 즐기던 한국 전통 성악 중 가장 격조 높은 노래다. 화려한 기교 대신 긴 호흡과 절제된 표현을 통해 우아함과 고결한 정서를 담아낸다. 반면, 그레고리오 성가는 유럽 음악사의 가장 오래된 형태로, 로마 카톨릭 전례에 사용되던 무반주 단선율(오직 하나의 음만 흐르는) 음악이다. 이 노래는 악기 없이 오직 순수한 목소리로 신을 찬양하며, 영적이고 명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정마리는 바로 이 두 노래가 가진 공통의 '순수성'과 '정제미'에 주목했다. 서양의 성가가 종교적 영성을 담았다면, 동양의 정가는 선비의 정신 수양을 담았다. 문화는 다르지만, 세속의 꾸밈을 걷어낸 본질적인 울림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두 장르는 완벽하게 조응한다. 그녀는 이 두 소리를 하나의 무대에 세움으로써, 궁극적으로 시대와 경계를 초월한 인간 본연의 소리를 듣는 이에게 전달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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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 형식을 빌려 소리의 본질을 묻다


정마리의 예술적 탐구는 공연 《Kairos, 소리의 층위》에서 매우 독특한 형식으로 완성되었다. 그녀는 한국의 가곡(정가의 한 종류)과 서양의 그레고리오 성가를 오직 1인, 무반주로 엮어냈다. 이 60분의 공연은 로마 카톨릭의 미사 양식을 그대로 차용하여 진행되었다.


미사란 카톨릭 교회의 가장 중요한 종교적 의식이지만, 이 공연에서는 그 의식의 순서와 구성을 가져와 음악적 구조로 활용했다. 프로그램은 "시작예식(RITUS INITIALES)", "말씀의 전례(LITURGIA VERBI)", "성찬전례(LITURGIA EUCHARISTICA)", "마침예식(RITUS CONCLUSIONIS)"으로 이어졌다. 이는 마치 하나의 엄숙하고 짜임새 있는 음악적 의례처럼 관객을 이끌었다.


정마리는 종교적 의례가 아닌 음악 공연으로서, 홀로 사제, 성가대, 회중의 역할을 모두 수행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때로는 기도처럼, 때로는 웅장한 찬양처럼 공간을 가득 채웠다. 이 형식 차용의 의미는 명확하다. 정가와 성가라는 동서양의 가장 오래된 노래들이 가진 '근원적 아름다움'을 종교적 경계를 넘어선 '음악적 의례'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특히, 정마리만의 독창적인 무반주 가곡이 가장 오래된 기록 음악인 성가와 쉼 없이 이어지는 순간은 장르와 시대를 허무는 하나의 소리 덩어리가 되었다. 듣는 우리는 그 소리의 층위 속에서,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이라는 모든 구분을 잊고 오직 '인간의 목소리가 만들어내는 순수한 울림'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여기에 설치미술가 정구종 아트디렉터의 감각적인 무대 연출까지 더해져, 정마리가 탐색한 Kairos(정확한 때, 순간)의 소리가 시각적으로도 완벽하게 구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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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마리 아티스트의 《Kairos, 소리의 층위》는 동서양의 가장 오래된 목소리를 하나의 무대 위에 세워, 소리의 근원을 탐색한 숭고한 여정이었다. 그녀의 '경계에서 중심을 보는' 예술 철학은, 정가의 정제미와 성가의 순수성을 미사라는 구조 속에 엮어내며, 시간을 초월한 '영혼의 울림'을 창조했다.


정마리의 목소리가 사제와 성가대, 회중의 역할을 홀로 수행하며 뱉어낸 무반주의 '결'은, 우리에게 익숙한 장르의 분류를 모두 잊게 했다.


우리는 그날, 김희수아트센터 SPACE1의 공간 안에서, 전통과 실험, 과거와 현재가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깊이 연결되는 기적을 목격했다. 정마리는 정가라는 자신의 단단한 중심을 통해, 그레고리오 성가라는 서양의 깊은 뿌리를 끌어안았고, 그 결과물이 바로 , 즉 '가장 의미 있는 순간'이었다.


이번 수림뉴웨이브 2025가 던진 '결: 예술가의 시간'**이라는 질문에 정마리는 가장 명료하고 아름다운 답을 제시했다. 그녀의 무반주 목소리는 한 예술가가 얼마나 오랜 시간, 치열하게 자신의 고유한 '결'을 다듬어 왔는지를 증명했다.


앞으로도 정마리가 이어갈 '소리의 층위'를 기대하며, 잊을 수 없는 감동과 여운을 선사한 이 무대에 깊은 찬사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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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아트인사이트에 기고한 글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아래 링크에서 전문을 읽을 수 있어요.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78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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