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교환학생 작문일지 -4-

주변이 조금씩 변하려 하고 있었다.

by MSJ

교환학생 15일차


어제 약속했던 대로 학교 소개 부스를 도왔다. 생각보다 많은 대학 부스와 먹거리가 준비되어 있었다.

순간 내가 영업에 소질이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열심히 일했더니 시간이 금세 지나갔다. 생각보다 많은 학생들이 우리 학교에 관심을 가져주고 있었고, 방학 프로그램 뿐만 아니라 학기 교환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도 있었다.

KakaoTalk_20210923_001112666.jpg 공개적인 글에 대학교를 공개하기가 좀 그래서 최대한 가려봤는데... 가리고 나니 자랑하려는 게 학교 부스가 아니라 스티커인 것 같다.


준비된 점심을 먹었는데, 학식보다도 맛있어서 (특히 타르트와 치킨 렌당)금세 해치웠다. 직원분들과 이야기하는 동안 진로 이야기가 나왔는데, 어쩐지 의대 이야기에 우울해져 방에 돌아와 침대에 눕고는 생명과학 진로에 관한 글들을 찾아보게 되었다. 몰랐던 내용들도 아닌데, 안 좋은 이야기와 좋은 이야기들이 머릿속을 교차해 지나가자 자신이 조금 없어졌다. 차라리 학교를 그만두고 의대를 가야하나 고민할 정도로.


그래서 내 우선의 가치가 무엇인지 정해봤다. 나에게 돈은 부모님이 행복할 정도면 충분하다. 부모님은 아무것도 해줄 필요 없다고 하셨지만, 여행도 가끔 보내드릴 정도의 형편이었으면 한다. 그 정도면 내가 좋아하는 걸 포기하면서까지 다른 길로 틀 필요는 없다.


이런 고민을 하다 보니 삶이 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 뜬금없는 생각이긴 한데, 꽃에 이름을 붙여주는 건 꽃에 삶을 부여하는 거지만 명칭을 붙여주는 건 분류한다는 거 아닌가. 이름 없는 풀꽃이 온실에 핀 장미보다 기억에 남듯, 삶의 이름을 종이나 속 같이 명칭으로 재단하다가는 삶이 그 본질인 독창성을 잃을까 걱정하는, 갑자기 든 쓸데없는 생각이었다.



교환학생 16일차


도서관에서 책 두 권을 빌렸다. 각기 다른 저자가 쓴, 디자인이 꽤 깔끔한 해석학책 두 권이다. 한 달 정도 빌릴 수 있는 것 같으니 그동안은 방에서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수채화 수업 2주차. 수채화를 이렇게 제대로 배워보는 건 처음이었다. 예전에는 할머니한테서 드문드문 배우는 게 전부였으니까. 풍경화를 그리는 시간이었는데, 생각보다 호평을 받아서 기분이 좋아졌다. 덩어리를 보는 연습과 명암 표현, 그리고 너무 어둡지 않게 그리는 방법에 대해 익혀야할 필요성을 느꼈다.

수채화를 배우면서 느끼는 감정은 아물도록 놔두면 덧날 수도 있는 상처를 꺼내 소독하는 기분이었다. 나에게 수채화는 지금은 세상에 없는 할머니의 것이 전부였기에.


교환학생 17일차


선명한 날씨였다. 하늘이 선명해서인지 풍경 전체가 선명해 쨍한 햇살에도 기분이 좋아졌다.

늦은 오후부터 W 언니와 bugis 역 근처 아랍 거리를 돌아다녔다. 나는 사진을 그리 잘 찍지 못하는 편인데, W 언니는 미안할 정도로 잘 찍어줘서 내내 잘 찍지 못하는 내 손을 탓했다.

저녁은 칠리 크랩을 먹었는데, 먹기 불편해도 맛은 좋아 한번쯤은 먹어볼 만한 맛이었다. 시리얼 새우튀김과 밥도 칠리 크랩의 소스와 조화가 괜찮았다. 뉴튼푸드센터는 가격대가 합리적인 편이라 부담 없이 먹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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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은 팬케이크를 앉아서 즐기기에는 시간이 없는 사람들을 위한 미니 팬케이크다. 오른쪽 두 사진은 아랍 거리를 찍은 사진인데, 하늘이 맑아서 풍경이 꽤 예쁘게 나왔다.

KakaoTalk_20210918_172508105_04.jpg 칠리 크랩은 진짜 호불호 안 갈리게 맛있었다. 다만 껍질을 분리하면서 먹기 너무 힘들어서 이 점에서는 호불호가 꽤 갈릴 것 같다. 한 번 먹고 나면 조금 지친다.


돌아와서 샤워하려다 도마뱀을 만났다. 우한 폐렴이 싱가포르에도 슬슬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뉴스가 떴다.

시내에 아직 마스크를 쓴 사람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일단 당장 버틸 양은 있는 게 다행이다.


교환학생 18일차


온종일 학교에 있었던 내 하루는 평화로웠지만, 속은 전쟁이었다. 설이라 그런지 도무지 마스크를 더 구하기가 힘들다.

기숙사가 오래 돼서 그런지 잘 때마다 기침이 나온다. 설마 우한 폐렴은 아니겠지 싶어 학교 뉴스를 보았지만 교내 확진자도 없었고, 무엇보다 낮 동안은 한 번도 기침이 나오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이 기숙사는 지은 지 오래된 곳이라 노후된 곳도, 먼지가 쌓인 곳도 많았다.

나는 결국 오후 내내 대청소를 했다.


교환학생 19일차


정신을 차려보니 오전 11시가 넘어 있었다. 얼른 나가 캔틴에서 J 언니와 W 언니와 같이 점심을 먹으며 나이트 사파리 얘기를 했다. W 언니는 피로하다고 해서 J 언니와 같이 나이트 사파리를 가기로 했다.

일찍 못 갔더니 10시 15분에 트램을 타게 되어버려서 좌절했는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데스크를 갔더니 10달러를 내면 일찍 입장하고 트램도 1시간 당겨 탈 수 있다고 한다. 우리는 10달러를 냈고, 그건 정말 최고의 선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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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라 그런지 화질이 별로 좋지 않다. 왼쪽은 걸어다니면서 나이트 사파리를 돌아다니면 볼 수 있는 공연이다. 트램을 타면 꽤 가까운 거리에서 맹수들이 어슬렁거리는 걸 볼 수 있다,


트램 대기 시간 동안 걸어 다니며 동물을 보았는데, 확실히 무섭단 느낌이 들긴 했지만 잊지 못할 경험이었다. 가까이서 동물을 보는 경험이, 그것도 밤에 본다는 게 새로운 느낌을 주었다. 짙게 깔려 있는 어둠이 내가 정말 야생 속에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을 주었다.

트램을 타는 동안은 이어폰으로 안내 방송을 들을 수 있다. 이곳의 수익 일부는 야생동물을 위해 쓰인다고 한다. 안내 방송에서는 잠깐 야생동물들이 얼마나 고통받고 있는지 이야기를 꺼내고 있었다. 내가 얼마나 오래 이 말을 기억할 수 있을까.



교환학생 20일차


J 언니가 현지에서 사귄 친구를 따라 인도식 아침을 먹고 보타닉 가든을 방문했다. 세부 전시는 거의 보지 않은 채 반 정도를 걸어다니며 정원을 구경했다. 잠을 별로 못 자서 졸렸는데, 정원을 보자마자 잠이 확 깰 정도로 보타닉 가든은 잘 꾸며져 있었다. 티백이나 찻잎을 팔기에 살까 고민하다가 나중에 한국에 간 뒤에 구하는 게 나을 것 같아 내버려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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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종류의 저렴한 난을 주문한 커리에 찍어먹을 수 있는데, 현지 친구가 안내해준 곳은 튀긴 난이 있었다. 은근 달달한 맛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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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타닉 가든 내에는 다양한 테마의 정원과 레스토랑, 기념품숍 등이 존재한다. 단순히 산책로라기보다는 자연 관광지라는 느낌이 강하니 꼭 가보는 걸 추천한다.


KakaoTalk_20210918_172508105_13.jpg 산책 직후 먹은 훠궈. 연기 때문에 조금 맛 없게 나왔는데 이래뵈도 맛있었다.


점심은 훠궈를 먹었는데, 매운 걸 싫어하는 나로서는 백탕이 취향에 맞았다. 아이스크림은 두 가지가 있었는데 색만 달랐지 둘 다 바닐라였다. 차는 너무 달아서 취향에 안 맞았다.


보타닉 가든을 소설에 넣어보고 싶은데, 어떻게 넣어야 할지 잘 감이 안 온다. 그러고 보니, 둘이 만날 약속을 잡는 걸 그릴 때가 됐지. 보타닉 가든 정도면 첫 데이트로 괜찮은 느낌이 아닐까. 걸으면서 이야기하기 좋고, 안에 있는 레스토랑도 분위기가 꽤 괜찮으니까.

개인적으로 로맨스에 소질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런 낭만적인 공간에 직접 발을 들이면 한 가지 영감 정도는 떠오르기 마련이다.

보타닉 가든의 어떤 풀들은 그녀의 키보다 더 크게 자라 있었다. 오른편을 보면 자신이 풀숲에 숨을 수 있을 정도로 작아진 동화 속 엄지 공주가 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돌려 왼편을 보면 걸리버의 모습으로 언덕 아래 소인국을 바라보는 것만 같았다. 고개를 돌리는 곳마다 비슷한 듯 다른 풍경이 이른 아침이라 살짝 찾아올 뻔했던 졸음을 흔들어 보내버렸다.
"갈림길이 많네요. 왼쪽은 샛길인 것 같지만."
“그쪽도 잠깐 들러볼까요?”
한나가 발을 뻗어 샛길로 가려던 찰나, 잘 착지했다고 생각했던 그녀의 뒷꿈치가 돌길의 틈새에 닿아 그대로 균형을 잃었다. 이대로 넘어지나 싶은 순간이었다. 한나의 등이 닿은 곳은 흙바닥이 아닌 산의 팔이었다
"미안해요. 넘어질 것 같아서."
"아, 아니에요. 제 실수였는 걸요."
산은 혹시나 한나가 넘어지지는 않을까 조심스레 팔을 떼었다. 만약 한나가 신고 온 게 운동화가 아니라 굽 있는 구두였다면 뒷굽이 부러질 만한 사고였다.
"한나 씨. 샛길은 조금 길이 험한 것 같은데, 혹시 괜찮으시면 손을..."
그는 한나가 구두를 신어서 넘어졌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한나가 무슨 소리냐며 멀뚱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자, 산은 이내 한나가 신은 신발을 쳐다 보았다. 그가 신은 단화보다 몇 배는 편해보이는 운동화가 눈에 들어오자 산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죄송해요. 넘어지신 게 신발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제가 좀 덜렁대서요. 괜찮아요, 그럴 수도 있죠 뭐. 근데, 이런 길을 걸으시기에는 신발이 조금 불편해보이시는 것 같은데..."
한나는 산 앞으로 나와 그를 마주본 채 자신의 손을 뻗었다. 산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한나를 바라보자, 한나는 씩 웃으며 산의 대사를 따라했다.
"샛길을 걸으시기에는 조금 불편해보이시는데, 손 잡아드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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