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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크랜디아 Oct 29. 2022

상대적 박탈감 증후군 투병기

Part  1. 집에 살던 시절은 행복했을까 -3

인생에 기회가 세 번 온다는 말이 있다. 그게 내 집 마련의 기회에도 해당되는 말은 아니길 간절히 바라본다. 그게 사실이라면 나에게 남은 기회는 딱 한 번뿐이기 때문이다.


나는 2016년 2월에 한국에서 결혼을 했다. 지금이야 '결혼할 때 서울에 집을 해오는 남자'가 환상 속에나 존재하는 유니콘이 되어버렸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아들 앞으로 아파트 하나쯤 해주는 보통의 부모님들이 있었다. 같이 근무하던 엄마뻘 연세의 옆반 선생님의 둘째 아들이 2015년에 결혼을 했다. 당시 공사들이 지방이전을 한창 하던 때라 관광공사에 다니던 예비 며느리가 서울에서 원주로 출퇴근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기차 타고 출퇴근을 할 수 있도록 청량리 아파트를 구해줬다고 하셨다. 

주변에는 부모님에게 도움받지 않고 부부가 열심히 모아 내 집을 장만하는 경우도 흔했다. 발령 동기였던 언니는 2019년에 결혼해 경기도 외곽의 아파트에서 전세로 살며 맞벌이로 열심히 돈을 모았다. 초임 부부교사 월급이 빤할 텐데도 3년쯤 뒤에 용인의 신축 아파트 분양을 받았다. 빚뿐인 내 집이라고 겸손하게 얘기했지만 아마 지금쯤은 그 빚도 다 갚았을 것이다.


내 집 마련이 꿈이 아니었던 시절이었다. 일단 결혼을 하면 부모님 도움을 받든, 부부가 열심히 모으든 내 집을 가질 기회가 있었다. 당시에는 조금 오래된 청량리의 아파트는 3억 대였고, 개발 중이던 용인의 신축 아파트도 4억 대였다. 호시절의 끄트머리에 결혼한 나 역시 그런 케이스들을 보며 결혼하면 집 하나 마련하는 게 그렇게 어려울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결혼을 하고 남편이 공부를 하고 있는 미국에서 2년 정도 지내다 올 계획이라 당장 한국에 신혼집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2년 뒤에 돌아오면 남편은 취직을, 나는 복직을 하고 둘이 알뜰살뜰 모아 집을 장만하고, 아이를 키우고 그렇게 평범하게 살 것이라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았다.





2016년에 온갖 미디어에서는 집을 사려는 사람들이게 "지금이 꼭지!"라고 얘기했다. 2017년에 2018년에도 그리고 2022년, 불과 얼마 전까지 꼭지론은 이어졌고 목이 꺾일 것만 같아 감히 쳐다보기도 어려운 저 높은 꼭지에 있는 서울 집값은 수많은 젊은이들의 내 집 마련의 꿈을 앗아갔다. 2016년 한국을 떠난 이후로 치솟기만 하는 서울 집값을 보며, 우리 인생에서 내 집 마련의 기회가 한 번 떠나갔음을 직감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예상치 못한 인생 계획 변경이 생겨 미국에서 일하며 살게 된 것이었다. 돌아가기로 예정되어 있었던 2018년 우리는 보면 볼수록 한숨 나오는 한국의 집값을 네이버로 들여다보는 것을 멈추고, Redfin이나 Zillow로 미국 집값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미국에도 뉴욕, 엘에이 같은 도시들은 한국 못지않게 비쌌지만, 당시 우리가 살고 있던 애리조나는 미국 내에서도 집 값이 싸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애리조나의 집값을 보고 있자니 다시금 내 집 마련이 손에 잡힐 만한 현실로 성큼 다가왔다. 


모기지론(주택대출)을 받기 위해서 신용을 쌓고, 열심히 일해서 월수입을 늘려가며 순조롭게 시간이 흐르고 드디어 론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이 되었다. 당시 20% 정도의 다운페이먼트를 내고, 우리가 대출받을 수 있는 주택 가격의 상향선은 32만 불, 4억이 조금 안 되는 금액이었다. 2020년의 애리조나에는 그 정도 예산 안에서 고려할 수 있는 넓고 괜찮은 집들이 수도 없이 많았고, 매주 집을 보러 다니기 바빴다.


딱 그즈음에 미국에도 코로나로 인한 타격이 시작되었다. 부동산 시장이 불안해졌고, 처음 집을 사는 우리의 마음도 덩달아 불안해졌다. 집을 사는 대신 몇 달간 만 렌트를 더 살면서 코로나가 끝나고 안정될 때까지 기다리자고 한 발 물러섰다.  모두 알다시피 코로나는 세계 보건기구가 선포하는 감염병 최고 경고 등급인 팬데믹

이 되었고, 모기지론 자격심사는 나날이 까다로워져 우리는 대출자격을 잃었다. 

사회 초년생들도 내 집 장만을 할 수 있을 만큼 저렴한 주택 가격을 뽐내던 살기 좋은 애리조나는 팬더믹 기간 동안 미국에서 부동산 가격과 렌트비가 가장 가파르게 상승한 지역이 되었다. 선택의 갈림길에서 한 발 나아가는 대신 한 발 물러선 결과는 참담했다. 인생에서 내 집 마련을 할 수 있는 두 번째 황금 같은 기회가 우리를 지나쳐 갔다.


2020년에 우리집이 될 수도 있었던 이 집은 2년 사이 30만불 대에서 50만불짜리 집이 되었다. 출처)REDFIN


그 이후 집 이야기는 우리에게 금기어 같은 게 되었다. 시작하면 무조건 한숨과 우울함, 가끔은 원망으로 끝나는 불청객 같은 주제였다.

집값이 오르기 직전인 2019년 끝물에 결혼과 함께 방 4개짜리 집을 산 친구는 매일매일 자고 일어나면 집값이 오르고 있다는 자랑을 했고, 직장동료는 15년 전쯤 직장 다닌 지 얼마 안돼 대출을 가득 받아 산 집의 대출원금과 이자로 한 달에 천 불정도를 낸다며, 그때 집을 사놔서 정말 다행이라고 안도했다. 

집에 대한 모든 대화는 부러움으로 시작되어 시기와 질투의 산맥을 올라 결국에는 박탈감이라는 낭떠러지로 내 마음을 잡아끌었다.

레드핀과 질로우로 저장해놨던 수많은 집들, 우리 집이 될 뻔했던 집들의 리스트를 새로고침 하고 들여다볼 때마다 오천 불 만불씩 오르는 걸 보고 있노라면, 실제로는 내 손에 쥐어본 적도 없는 그 만불을 며칠 새에 잃은 것만 같아 속이 쓰려 어쩔 줄 몰랐다.


오래간만에 애리조나에서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인 세도나로 가족 나들이를 떠나는 날이었다. 오랜만에 하는 여행에 설레는 마음으로 앞자리에서 남편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사 얘기가 나오게 되었다. 곧 재계약을 할 때가 다가오는데 이번엔 집을 살 건지, 다운페이는 어떻게 마련할 건지, 론을 받을 수 있는 건지 예민한 이야기를 하다가 결국엔 언성이 높아지고 말았다.

뒷자리에 앉아 신나서 종알거리던 아이는 점점 말이 없어졌다. 집 때문에 처음으로 아이가 있는 자리에서 부부싸움을 했다. 집 때문에 즐거운 가족여행도 망쳐버렸다. 오만가지 감정이 밀려왔다.

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상대적 박탈감 증후군' 환자가 되어버렸다는 것을.


이왕 나온 여행 즐겁게 다녀오자고 대화를 급히 마무리하고 돌아올 때까지 이 이야기는 잠시 보류하기로 했다. 무거운 짐을 마음에 얹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루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피곤한 아이가 카시트에서 새근새근 잠든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우리는 다시 그 이야기를 시작했다.


"집 생각을 하면 나도 마음이 어려워. 그렇지만 다시 2020년으로 돌아갈 수 없고 그때 집값과 비교하면서 지금 오른 집값에 괴로워하는 거는 정말 의미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

"맞아. 생각해보면 지금 몇 억씩 오른 그 집들 말이야. 우리 집이었던 적도 없잖아."


박탈감은 사전적 정의로 "재물이나 권리, 자격 따위가 빼앗겼다는 느낌이나 기분"을 말한다.

현대인의 고질병인 상대적 박탈감은 "자신이 실제로 잃은 것은 없지만 다른 대상이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있거나 가지게 되는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자신이 무엇을 잃은 듯한 기분을 느끼는 것"이다.


내가 실제로 잃은 것이 없다는 사실을 똑바로 바라보자, 폭주기관차처럼 날뛰던 내 안의 못난 마음, 나보다 더 많이 갖고 있어 보이는 다른 대상에 대한 비교에 비로소 브레이크가 걸리기 시작했다.

현대인의 고질병으로서 치료 없이 방치하면 만성질환이 되기도 하고, 완치된 줄 알았는데 어느새 재발하기도 하는 이 질병의 특성상 나 역시 '상대적 박탈감 증후군'에서  완벽하게 벗어났다고 아직 장담할 수는 없다. 하지만 모든 병의 치료는 내 증상을 인지하고 인정하는 지점에서 비로소 시작이다.

나는 "근 2년 간 앓아오던 상대적 박탈감 증후군"에서 벗어날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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