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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크랜디아 Oct 29. 2022

이사 날짜가 없는 이사는 처음이라

Part 2. 캠핑카에 살기로 결심했다 - 1

내가 상대적 박탈감 증후군을 앓고 있음을 인지하고,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자 생각지 못한 새로운 길이 보였다.  화장실만 내 집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빚을 내서라도 내 명의의 집을 가지는 것만이  집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욕망에서 벗어나는 길은 실은 두 가지였다. 

집을 사거나, 집을 사고 싶다는 소망을 다른 소망으로 대체하거나.


현실적으로 당장 집을 사는 것은 쉽지 않아 보였다

첫째로 여전히 우리에게는 다운페이가 충분하지 않았다. 코로나 이후 집값은 올랐고, 30년짜리 장기주택대출인 모기지론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은 더욱 까다로워졌다. 은행이 아니라 중개인을 통해서 샅샅이 잘 찾아본다면 다운페이를 적게 내는 대신 높은 이율로 대출을 받을 수 있는 곳이 분명히 있겠지만 그보다 본질적인 문제는, 우리가 어디에 살고 싶은지 정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익숙한 애리조나에 집을 사고 적응과정과 시행착오 없이 편안하게 정착할지, 아니면  새로운 곳으로 이주해  낯섦과 설렘이 공존하는 삶을 시작해 볼지 두 가지 선택지 앞에 우리는 수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우리 종종 얘기했잖아. 언젠가 캠핑카를 타고 1년 정도 이곳저곳 다니며 살아보고 싶다고. 1년이나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거 지금 해보는 건 어떨까?"


우리는 가끔 이런 류의 미래계획을 세우며 행복함에 도취되곤 하는데, 예를 들면 경비행기 조종사 자격증을 따고 작은 4인용 비행기를 하나 사서 뒤에 아이를 태우고 미국 횡단을 하자든가, 다른 나라에 가서 1년씩 중간 여행자처럼 살아 보자든가, 아이가 성인이 되면 한국에 돌아가 남편의 고향인 안동의 시골집을 수리하고 소나무가 빼곡한 뒷동산에다 숲학교를 하며 살자든가 그런 이야기 말이다. 상상만 해도 세로토닌이 마구마구 솟아나는 그런 미래 계획들을 입 밖으로 신나게 내뱉어보는 것이, 그리고 가끔은 뜬구름 잡는 것 같은 그 계획이 정말 좋은 생각이라며 서로 맞장구 쳐주는 것이 우리 부부만의 행복한 취미였다. 


캠핑카 ‘여행’이 아닌 캠핑카 ‘생활’은 그 수많은 뜬구름 계획 리스트 중 가장 오래된 것이었다. 

그 시작은 뉴질랜드를 3주간 캠핑카로 종단하는 6년 전 신혼여행으로부터였다. 뉴질랜드 여행의 성수기인 겨울이어서 그랬는지 어쨌는지 뉴질랜드에 도착하자마자 캠핑카 예약에 문제가 생겼다는 걸 알게 되었다. 신혼여행이라 큰 맘먹고 예약한 침대도 크고 화장실도 있는 캠핑카 대신 당일 예약 가능한 캠핑카는 뒷자리가 침대와 소파로 트랜스포머 되고 뒷문을 열면 주방이 있는, 요즘으로 치면 차박에 가까운 구조의 캠퍼밴뿐이었다. 불행 중에 그나마 장점이라면 1주일 빌릴 예산으로 3주를 빌릴 수 있었고, 1주 럭셔리 캠핑카 + 2주 호텔의 모험과 휴양이 잘 배합된 신혼여행 코스는 즉흥적으로 3주 캠핑카 여행으로 바뀌었다.  

우리는 여행 내내 이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일주일만 했으면 아쉬워서 어쩔 뻔했어. 3주도 너무 짧아."

"1년 정도 살아보면 아쉽지 않을 것 같지 않아?"


그렇게 1년 간 캠핑카에서 살아보기는 '언젠가는 꼭 해보고 싶은 소망 바구니' 속에 자리 잡게 되었다. '언젠가는'이라는 말로 시기를 정확히 지정한 적 없는 계획들이지만 생각하고 바라고 또 입 밖으로 꺼내놓고 있으면 언젠가는 그때가 올 거라는 막연한 믿음이 있었다.


그리고 그때가 바로 지금이 아닐까 싶었다.


3주간 뉴질랜드에서 함께한 작고 귀여운 JUCY 렌털 캠퍼밴. 길에서 다른 JUCY 운전자를 만나면 서로 손인사를 하며 내적 친밀감을 쌓곤 했다.


아이는 막 만 4살이 되었다. 미국의 정식 공교육이 시작되는 5살이 되기까지 1년이 남아 있었다. 복잡한 전학과정과 공식적인 교육과정과 학습목표에서 모두 자유로울 수 있는 마지막 1년이었다. 남편은 텍사스에서 일할 기회가 있었고, 감사하게도 그 일은 어디든지 간에 공항만 있다면 비행기로 출퇴근을 할 수 있었다. 나는 떠나고 싶었고, 결혼 전처럼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마디를 시작하고 싶었다. 타의가 아닌 자의로 말이다.

순식간에 집을 사고 싶다는 소망은, 캠핑카에 살며 다양한 곳에서 지내보고 싶다는 소망으로 대체되었다.

소망의 방향이 바뀌자, 그동안 나를 갉아먹던 무기력과 굴욕 그리고 상대적 박탈감으로부터 비로소 크게 한 발짝 떨어져 나올 수 있었다.


떠나자고 마음먹자 그다음은 꽤나 쉽고 빠르게 진행되었다.

소유한 집이 없기에 집을 팔기 위해 해야 하는 수많은 수고들로부터 자유로웠다. 그저 2천 불씩 월세를 내며 살던 남의 집에 "저희 이사 갑니다."라고 두 달 전에만 얘기해주면 그뿐이었다. 시기는 여름방학이었기에 이미 아이가 다니던 유치원은 학기가 끝난 뒤였다. 8월에 시작하는 다음 학기는 등록하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여행이 아니라 풀타임으로 생활할 캠핑카를 구입하는 것이라 고려할 점이 많긴 했지만, 집을 사는 것 마냥 혹시나 가격이 떨어지면 어쩌지, 혹시 살다가 맘에 안 들면 어쩌지 하는 고민은 할 필요가 없었다. 가격과 우리의 생활패턴을 고려하여 적당한 선에서 타협했다. 캠핑카에 가져갈 최소한의 간결한 짐들을 제외하고 남은 짐들을 보관할 창고를 구했다. 땅이 넓은 미국답게 곳곳에 저렴한 가격으로 창고를 장기대여할 수 있었고, 우리는 가까운 곳에 차 한 대가 들어갈만한 크기의 창고를 계약했다.

 

이사를 위한 사전 준비는 허무할 정도로 간단히 끝났다. 지난 6  알고 지내던 사람들과 작별인사를 하는 과정만이 남았다. 가장 어려운 과정이었다. 인사할 사람들을 챙기다 보니 아무도 없는 미국 땅에 처음 도착했던 6년 전과 비교하면 정말 믿을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있음이 새삼 놀라웠다. 

전학 온 초등학생 마냥 빨리 내 가족, 내 친구들이 있는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날마다 전화기를 붙잡고 징징거리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6년이 지나 떠날 자리를 되돌아보니, 마음이 어려울 때 속 깊은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친언니 같고 친동생 같은 친구들, 미국 엄마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사랑으로 품어준 나이 차이 많이 나는 친구들, 온갖 미국 명절과 가족행사에 초대해주는 가족 같은 친구들이 모두 그곳에 있었다.


" 우리 결국 이사 가기로 결정했어. 텍사스 휴스턴으로."


우리가 이사를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던지라 놀람보다는 아쉬움 가득한 반응이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질문인 "이사 날짜"에 대해서 얘기하기 시작하자 갑자기 이야기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세례가 되어버렸다. 


A : 우리 이사 가기로 했어.

B : 아쉽다. 그럼 이사 날짜는 언제인데?

A : 응 8월 10일이야.

B : 얼마 안 남았네. 짐 싸느라 바쁘겠다. 도와줄 것 있으면 얘기해! 


보통의 이사라면 이렇게 간결하게 끝날 대화였다. 하지만 이건 보통의 이사가 아니었다.


A : 우리 이사 가기로 했어

B : 아쉽다. 그럼 이사 날짜는 언제인데?

A : 음. 지금 살고 있는 집에서 짐을 8월 10일에 빼서 창고에 넣을 거야.

B : 창고? 휴스턴에 구한 집이랑 이사 날짜가 안 맞아서 잠깐 보관하는 거야?

A : 아니 우리 휴스턴에 아직 집은 안 구했어.

B : 가서 살 집이 없다고? 아 그럼 일단 가서 호텔에서 지내면서 좀 알아보고 정하려고 하나 보네.

A : 아니 우리 캠핑카 샀어. 그걸 타고 갈려고.

B : 캠핑카?? 아 그럼 캠핑카를 타고 휴스턴에 도착해서 호텔이 아니라 캠핑카에서 지내면서 집을 알아보려고 하는 건가 보네. 

A : 아니 휴스턴에 바로 가는 건 아니야. 일단 여행하면서 가보려고. 가는 길에 좋은 곳이 있으면 1,2주 혹은 한 달쯤 멈췄다가 갈 수도 있고. 

B : 응??? 그럼 여행을 좀 하다가 휴스턴에 가서 집을 알아보려는가 보네.

A : 아니 집을 휴스턴에 구할지는 일단 떠나보고 결정하려고. 거기서 안 살 수도 있고.


이쯤 되면 나의 "아니, 그건 아니고.." 폭격에 다들 정신이 혼미해져 있었다. 하지만 이게 정말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이었다. 우리의 계획은 휴스턴까지 가는 길에 맘에 드는 곳이 있으면 며칠씩이고 여행하면서 천천히 이동하는 것이었고, 휴스턴에 도착해서도 언제쯤 캠핑카 생활을 청산할지 아. 무. 런 계획이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질문하는 사람도, 대답하는 사람도 이 듣도 보도 못한 이사의 정체에 대해 명쾌한 답을 얻지 못했지만, 모두들 우리의 새로운 출발에 축복을, 그리고 여행길의 안녕을 빌어주었다. 나를 가장 잘 아는 친구는 축복기도의 말미에 이렇게 물었다.


"참 너답긴 하다. 근데 좀 걱정되지 않아?"


놀랍게도, 걱정이 그다지 되지 않았다. 

6년 전 미국에 처음 왔을 때 나는 참 걱정이 많았다. 문화, 언어, 직업, 인간관계까지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달라진 환경에 내던져진 내가 뿌리채로 옮겨와 다른 땅에 심어진 다 자란 나무 같았다. 큰 나무를 옮겨심게 되면 이전에 심겨있던 땅의 흙을 가져와 같이 심어준다고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새로운 흙에 적응하지 못하고 제대로 뿌리를 내리지 못하다가 시들어 죽기도 한단다.

당시 내 주변에는 온통 새로운 흙뿐이었다. 원래 심겨있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기만을 기다리던 시간들은 외로운 땅에서 살아내고자 하는 시간들과 함께 켜켜이 쌓였다. 평생 뿌리내리지 못할 것이라 여기기도 했지만, 그 시간들과 함께 나는 어느새 이곳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새로운 잎을 틔우고 있었다. 


이 과정을 한 번 겪어본 덕인지 새로운 환경에 다시금 내던져지는 일이 그리 걱정이 되지 않았다. 이제는 어느 곳에 옮겨 심어 진들 예전처럼 조급해하지도, 불안해하지도 않고 천천히 새로운 흙냄새를 음미하며 낯선 땅의 아름다움을 찬찬히 탐색해볼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어느 누구에게도 이사 날짜를 제대로 알려줄 수 없다는 사실 말고는 모든 것이 순조롭게 잘 돌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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