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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크랜디아 Oct 29. 2022

이사는 설렘이 아닌 설움이 되었다.

Part  1. 집에 살던 시절은 행복했을까 -2

이사는 나에게 언제나 설레는 일이었다. 

스무 살이 되던 해 3인 1실 학교 기숙사부터 시작해 맘 맞는 친구와의 첫 자취, 처음으로 갖게 된 오롯이 나만을 위한 작은 공간까지 대학 4년이란 시간 동안 이사만 총 4번을 했다. 1년에 한 번 꼴이었다. 그나마 짐이 단출했고, 학교에서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서만 움직였기에 1년에 한 번씩 짐을 나르러 연례 이사 도우미를 자처한 친오빠에게 그나마 면목이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시작할 때 오빠가 말했다. 

"동생아, 무조건 직장 가까이에 사는 게 최고다. 이제는 집 구하면 좀 오래 사는 거지?"

경험에서 우러나온 직장인 선배님으로서의 조언과 연간 이삿짐 인부 일을 청산하고 싶은 오빠로서의 소망이 무색하게도, 나는 직장 근처에는 살기 싫다며 기어이 지하철 5 정거장 플러스 도보 15분 거리에 집을 얻었고, 이 후로도 집 계약이 끝날 때면 출퇴근 30분 거리 안에 있는 동네 중에 새로운 곳을 골라 짐을 쌌다. 오빠에게 단 하나의 희소식이라면, 이사의 텀은 매 년이 아니라 2년으로 늘어났다는 것이었다. 


 2년마다 이사를 할 때가 되면 묵은 짐들을 버리고 정리해가며 1톤 트럭에 딱 맞게 짐을 쌌다. 가벼워진 짐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훌쩍 떠나는 이사라는 행위는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인생의 마디가 되어줬다.

시간 자체는 눈에 보이는 형체도, 분명한 시작과 끝도 없기에 우리는 시간을 재단해 그 실체를 만들어낸다. 새해 첫날은 그저 어제와 같은 해가 돌아오는 또 다른 아침일 뿐이지만, 우리는 모두 매 년 1월 1일이 되면 새로운 시간이 시작되는 것처럼 자체적인 틀을 만들어 과거를 털고 새 마음으로 시작할 기회를 갖는다. 다이어트도, 영어공부도 1월 1일부터 시작하면 새로운 내가 될 것만 같다.

나에게는 이사가 나만의 시간을 자르는 틀이었다. 2년마다 나는 새로운 공간으로 이동함으로써 새로운 시간을 시작했다. 마디가 하나, 둘 늘어남에 따라, 나는 이삿짐 업체 직원처럼 짐을 잘 싸게 되었고, 새로운 동네에서 만들어진 새로운 추억들이 마디마디 결 따라 아로새겨졌다.

 

'어른'들은 집이 한 채 있어야 된다고 입버릇처럼 얘기했지만, 변화를 싫어하고 안정을 추구하는 게 '어른'들의 속성이라 그렇다고 치부해 버렸다. 나의 생계를 스스로 책임지고, 혼자만의 공간에서 살고 있고, 내 인생의 선택지를 스스로 결정하며 산지 꽤나 오래된 나는 이미 어른의 카테고리에 속해 있었던 것 같다. 단지 서른이 넘어서도 스스로가 '어른'이라는 자각 없이, 여전히 변화를 즐기는 나 스스로에게 대견함을 느끼며, 결혼이라는 어른들의 세상으로 저벅저벅.. 보다는 폴짝거리며 뛰어 들어갔다.


결혼 전 대부분의 물건을 정리하고 난 뒤 남은 물건들을 본가의 어릴 적 쓰던 내 방으로 옮기는 날이었다. 싱글로서의 마지막 이사였다. 오빠에게는 12년에 걸친 이사도우미 봉사생활을 청산하는 날이기도 했다. 

"동생아, 이제 결혼하면 방랑벽 좀 버리고 애 키우기 좋은 곳에 집부터 사. 위치 좋은 곳 아파트는 절대 떨어지지 않는다."

2년 전 결혼하고 얼마 전 신도시 브랜드 아파트를 분양받은 결혼 선배님의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충고였다. 결혼 후 1년 간 오래된 아파트에 살며 알뜰살뜰 돈을 모아 청약을 노렸지만 실패한 오빠는 거기서 포기하지 않고 프리미엄을 얹어 로열층 아파트 분양권을 샀다. 몇 달 사이에 프리미엄을 회수하고도 한참 남을 만큼 아파트 가격은 상승했다.


결혼이라는 인생의 큰 변화와 함께 나도 이제는 좀 어른답게 행동해야 지하는 프레임 때문인지 이번에는 오빠의 조언이 그저 한 귀로 흘려들어지지만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 후에도 나는 여전히 2년마다 집을 옮겨가며 살게 되었다.

결혼 전과 차이점이라면 자의 120%로 진행되었던 이사는 자의보다는 타의의 영향을 더 많이 받게 되었다. 즉, 그저 새로운 곳에 살아보고 싶어서라는 지극히 이상적인 이유에 의해서가 아니라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들로 살던 곳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1인 가구 시절, 산뜻한 마음으로 묵은 짐을 정리하고 떠나던 희망찬 새 출발 같던 이사는, 무섭게 증식하는 아이의 짐과 부부의 짐에 압도당해짐 싸는 순간부터 짐 푸는 순간까지 어느 한순간에도 설렘이 끼어들 틈 따위는 없었다.

이사는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은 고행이 되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6년 간 3번의 이사를 거치며 남의 집 생활을 하고 나니, 그제야 비로소 어른들이 말하던 집 없는 설움에 대해 알게 되었다. 

한국과 달리 미국은 아파트를 지은 뒤 개인 분양을 하지 않고, 회사 관리 하에 세입자를 받는 방식으로 운영한다. 개인 소유가 아니기에 아파트에 사는 동안 집에 문제가 생기면 회사에 소속된 관리 직원이 나와서 뚝딱뚝딱 문제를 해결해주고 가기에 편한 부분도 많다. 대신 회사 입장에서는 매 월 월세를 따박따박 잘 낼 수 있는 사람을 가려서 받는 게 중요하기에 입주할 때 소득과 신용을 증명해야 하는 절차가 필수이다.

 

미국에 와 첫 아파트를 구할 때는 오히려 쉬운 편이었다. 공부하러 온 유학생이 소득이 없는 것은 당연했기에, 아파트 회사에서는 소득증명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대신 석 달 치 정도 월세를 미리 내는 것으로 우리의 경제적 안정성을 증명했다.

문제는 두 번째 아파트를 구할 때부터였다. 발품을 팔고 또 팔아, 아이와 함께 살 맘에 드는 아파트를 찾고 계약하겠다고 하자, 오피스 직원이 건조하게 얘기했다

"이 집에 들어오려면 너희 가계 소득이 월세의 3배 이상 되는 걸 증명해야 하고 전 아파트 관리인에게 너희가 좋은 세입자였다는 서류를 받아와야 하고.."

당시 남편은 공부를 마치고 일을 하고 있긴 했지만, 갓 일을 시작한 데다 일하는 시간이 턱없이 적었다. 부족한 돈은 나의 한국 직장에서 나오는 육아휴직수당과 20대 시절 일개미처럼 일하며 저축한 돈으로 충당하며 생활을 하고 있었다. 계산해보니 매 달 들어가는 생활비가 월세의 3배쯤 들었다. 괜히 가계소득을 월세 3배로 증명하라고 하는 게 아니긴 했다. 하지만 가진 돈 까먹는 생활을 하는 우리로서는 그만큼의 소비를 증명할 수 있을지언정, 소득을 증명할 수는 없었다.

다른 방법은 없었다. 전 아파트에 사는 2년 동안 우리가 단 한 번의 연체도 없이 월세를 잘 낸 모범 세입자(?) 였다는 서류를 받아 들고 우리 사정을 구구절절 이야기하며, 우리가 벌이는 지금 이모 냥이지만 계좌에 돈은 이만큼 있다는 것을 보여주며 우리가 절대 절대 월세 밀릴 사람이 아니란 것을 온 힘 다해 증명해야 했다. 

결국 우리는 세 달 치 월세를 미리 내는 조건으로 그 아파트에 들어가게 되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우리의 노력이 빛을 발했다기보다는 그 당시 첫 세입자를 채워 넣는 새 아파트였기 때문에 예외를 두지 않았나 싶다. 


어찌 저지 아파트에 들어갔고, 1년이 흘러 재계약 시즌이 다가왔다. 무슨 이유인지 미국의 아파트들은 보통 최대 1년 단위로 계약한다. 6개월만 더 살아야 한다면 1년짜리 계약보다 훨씬 비싼 월세를 내야 하지만 2년을 산다고 해서 월세가 더 싸지지는 않는다. 2년짜리 계약이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있다면 매년 3% 정도의 월세가 자동 인상된다는 조건이 분명 계약서에 붙어 있을 것이다.

재계약 시기가 다가오면 아파트 회사에서는 다음 1년 재계약 시 월세를 알려주고 재계약 여부를 통상 두 달 전에 알려달라고 한다. 우리의 첫 아파트에서는 재계약 때 단 돈 10불을 인상했다. 비슷한 시기에 살던 집 계약을 연장한 지인 중에 100불을 한 번에 올리는 바람에 다른 집을 찾겠다고 하소연하는 소리를 들은지라 살짝 긴장했지만 우린 다행히 물가 상승률에도 못 미치는 금액이 인상되었고 감사한 마음(?)으로 재계약을 했었다.

하지만 두 번째 집은 상황이 좀 달랐다. 통상적으로 많아봤자 5%를 인상하니까 대략 5-60불 올릴 것이라 생각한 우리의 예상과 다르게 80불이 인상되었다. 매달 80불의 지출이 더 나가게 생겼다. 오피스에 가서 혹시 좀 깎아줄 수 없냐고 넌지시 사정해봤지만 이 근처 아파트 수요가 높아져 지금 렌트비가 올랐기 때문에 주변 시세에 맞춘 금액이라고 딱 잘라 얘기할 뿐이었다.

그 이후로도 가슴 떨리는 재계약 시즌을 세 번쯤 더 거쳤다. 다음 계약부터는 매달 400불씩 더 내라는 집주인의 통보에도 "여기만 집인가 이사 가지 뭐!"라고 하지 못했던 것은 이사라는 고행을 한 번이라도 줄여보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한 달에 2 천불씩 월세를 내며, 곧 코로나도 끝나고 집값도 렌트비도 모두 안정되겠지 하는 기대도 했지만 모두가 알다시피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돌이켜보니 스무 살부터 현재 서른여덟이 될 때까지 한 집에서 2년 이상을 살아본 적이 없었다. 그나마 결혼 전에는 자발적인 떠돌이이자 자유로운 방랑자였지만, 결혼 후 미국에서는 끊임없이 내가 좋은 세입자인지를 증명하며, 우리 가족을 받아주는 곳을 찾아다니는 그저 내 집 없는 사람들 중 하나였다. 

이사가 반복될수록 나도 번듯한 내 집을 갖고 싶다는 마음은 점점 커졌고, 내 마음에 뿌리내리기 시작한 이 작은 소망은 반복되는 이사와 함께 무력감이란 싹을 틔었다.  

그 와중에 읽었던 피터 비에리의 <삶의 격>에서 이런 감정의 실체를 마주했다

 

"우리는 자신이 바라는 것을 이루지 못했을 때 무력해진다. 그런데 굴욕으로서의 무력감은 이와는 다른 것이다. 다시 말해 삶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소망이 있을 때 그것을 이루지 못하는 불능성이다."


나는 단순한 그냥 무력감이 아닌 굴욕으로서의 무력감을 느끼는 중이었고, 그 감정은 나의 마음 가장 여린 곳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꽤나 지독한 녀석이었다.

미국 생활 7년 차, 이사는 더 이상 설렘이 아닌 설움이 되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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