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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크랜디아 Oct 29. 2022

미국에는 정녕 전세가 없나요?

Part  1. 집에 살던 시절은 행복했을까 -1

"와 여기가 우리 신혼집이구나!"

커다란 캐리어를 양손에 끌고 미국 땅에 당도한 우리의 신혼집은 원베드룸 아파트였다. 

문을 열고 들어오면 오른쪽에는 아담한 거실이, 왼쪽에는 좀 더 아담한 부엌이 한눈에 들어오는 공간이었다. 방도 하나 화장실도 하나였지만, 결혼 직전까지 10년 넘게 자취를 하면서 스튜디오형 오피스텔 혹은 방 하나 짜리 빌라에서 살았던지라 좁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았다. 테라스 문을 열고 나가자 눈이 시원해지는 커다란 나무들로 가득했고 미국에 온 느낌 물씬 나게 해주는 야자수와 푸른 잔디가 보였다. 자취할 때는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뷰가 끝내주는 테라스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나는 우리의 신혼집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


정작 나를 불편하게 한 것은 신혼집의 '크기'가 아니라, 신혼집의 '가격'이었다. 

"한 달에 렌트비가 얼마라고?"

"800불. 전기랑 물세는 따로."

모든 것을 한화로 계산하는 것이 편했던 그 시절 800불을 당시 환율로 계산해보니 거의 100만 원 가까이 되는 금액이었다. 강남 한복판에 있는 원룸에서 사는 친구가 월세를 백만 원씩 내면서 산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와 그렇게 큰돈을 매달 월세로 내고 나면 어떻게 살지" 하고 친구의 경제상황을 나 홀로 염려했던 게 떠올랐다.  

그러던 내가 한 달에 백만 원씩 하는 집에 살게 된 것이다. 서울 한복판에 살아야지만 쓸 수 있는 돈이라 생각했는데, 그다지 대도시도 아닌 애리조나에 살면서 이 돈을 쓰게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돈이 아깝던 시간은 잠깐이었다. 현지에서 새로 만난 사람들에게 그들이 사는 집은 얼마나 더 비싼지, 우리가 얼마나 시세에 비해 합리적인 가격으로 집을 구했는지를 듣게 되자 내 머릿속의 '백만 원이나 하는 월세'는  어느새 '800불 밖에 안 되는 돈'이 되어버렸다. 


돗자리 깔고 우리도 저렇게 종종 테라스에 누워있곤 했었던, 우리의 첫 미국 월셋집


첫 집을 생각하면 집 안에서의 시간보다는 테라스에서 보낸 시간들이 많이 떠오른다. 미국 아파트의 테라스들은 한국처럼 유리 새시가 없어서 내부 공간이라기보다는 어느 정도 프라이버시가 보장된 외부공간 같은 느낌이다. 이사 첫날부터 마음을 빼앗겼던 테라스에 예쁜 전구를 달아놓고, 나무 그늘이 넉넉하게 지는 오전에 나가 혼자 차를 한 잔 마시며 바깥구경을 하는 것이 일상의 한 조각이었다. 좌식과 와식의 민족답게 테라스 바닥에 돗자리를 깔고 시원한 밤이면 맥주를 한 잔 하다가 어느새 벌러덩 누워 별구경을 하기도 했다. 


조금 오래되고 작았지만 테라스에서 보는 경치가 아름다웠던 우리의 첫 집 원베드룸 아파트에 그렇게 신혼 첫 2년을 잘 살고 이사를 가게 되었다. 뱃속에는 새로운 가족 구성원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첫 집은 작았지만 우리 둘이 살긴 충분했다. 하지만 아기가 생기면 방이 하나 더 필요할 것 같았다. 

첫 집은 엘리베이터가 없는 3층짜리 건물에 꼭대기 집이었지만 운동부족에 계단 오르기라도 할 수 있으니 감사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아기가 생기면 유모차와 아기를 안고 3층을 오르락내리락할 자신이 없었다.

첫 집은 지은 지 오래됐지만 그만큼 크고 그늘이 넓은 나무들이 단지 안에 많아서 산책이 즐거웠다. 하지만 나무들과 함께 오랜 시간 그곳의 터줏대감인 바퀴벌레와 함께 신생아를 키우고 싶지는 않았다. 


모든 조건을 따지고 따져, 새로 지은 아파트의 1층에 있는 투베드룸 아파트를 구했다.

방 하나에서 두 개로, 화장실도 하나에서 두 개로 크기가 커진 데다 막 지은 새 집이고  계단을 오르지 않아도 되는 1층이란 프리미엄이 더해져 월세는 껑충 뛰었다. 

"한 달에 1250불. 물론 전기랑 수도는 따로."

한화로 140만 원쯤 되었다. 당시 140만 원쯤 내면 서울 아파트에도 월세로 살 수 있다고 했다. 이런 큰 고정지출을 매월 낼 생각을 하니 부담감이 밀려왔지만, 아기가 태어나니까, 그리고 다행히도 2년 사이에 공부가 끝나고 적게나마 돈을 벌 수 있었기에 눈 딱 감고 질러버렸다.


우리의 두 번째 집은 신축 아파트의 1층이었기 때문에 예전 집처럼 창 밖으로 보이는 무성한 나무들은 없었다. 대신 애리조나에서만 만날 수 있는 대형 선인장 뷰를 거실의 가장 큰 창 밖을 통해 즐길 수 있었다. 서향으로 난 창문이 주는 노을은 예상치 못한 추가 옵션이었다.

해 질 녘이면 이 자리에서 노을과 야생동물을 구경하곤 했다.


여행가방 4개로 시작한 단출한 살림을 두 사람의 온기로 차곡차곡 채워 넣었던 우리의 첫 신혼집도 좋았지만, 나는 우리의 두 번째 집에 늘 마음이 좀 더 기울어진다.

첫 옹알이, 첫니, 첫 뒤집기, 첫 이유식, 첫 이발, 첫걸음마, 처음으로 '엄마'하던 순간까지, 아이와 함께 한 모든 "첫 순간"들이 이 집에 녹아있다. 타지에서 고군분투 신생아를 돌보느라 몸과 마음이 지칠 던 순간들이 일상이었지만, 매일 저녁노을이 집 안으로 "똑똑" 하고 발들이는 집이 주는 특유의 평안 덕분에 툭툭 털고 또 하루를 시작하곤 했다.


이 집을 떠나게 된 건 또 다른 2년이 흐른 후였다. 2020년이 되었다. 막 두 살이 된 아이와 지내기에 집이 조금 좁게 느껴지던 찰나였고, 세 번쯤 집 안에서 스콜피온을 발견하자(믿기 어렵겠지만 애리조나에서는 꽤 흔한 일이란다.) 안전을 위해 이사를 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세 번째 집을 구했다. 마당은 없지만, 우리만의 차고가 있는 2층짜리 타운하우스였다. 여전히 방은 2개였지만, 거실과 부엌이 이전보다 훨씬 커졌다. 자동차 2대가 들어가는 큰 차고가 있었고, 단지 안에는 사시사철 꽃이 피는 산책로도 있었으며, 수영장도 2개나 있었다. 예상한 대로 월세는 더욱더 비싸졌지만 이젠 그다지 큰 타격은 없었다.

"1400불? 뭐, 괜찮네."


미국 살이 4년 만에 차고가 있는 집에 살게 된 편안함, 아파트 주차장 아스팔트 산책길이 아닌 계절마다 다른 꽃과 나무들이 있는 산책길을 아이와 걷는 행복감, 그리고 스콜피온과 작별을 고한 안정감까지 모든 것이 만족스러운 생활이었다.

1년이 지나 재계약을 하게 될 때 집주인이 200불을 올려달라고 했다. 이제는 매달 200만 원 가까운 돈이 월세로 나가게 되었지만 재계약을 하던 2021년에는 팬더믹과 함께 무서운 속도로 미국 전역의 집값과 렌트 값이 치솟고 있었던 시기였다. 특히 우리가 살던 애리조나 피닉스는 미국 내에서도 렌트비 상승률, 집값 상승률 1위를 찍는 달갑지 않은 기록을 경신 중이었던 터라 200불만 인상한 집주인에게 감사할 지경이었다.


그 후로 1년이 또 지났고, 직장 때문에 애리조나를 떠나 타주로 이사를 갈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변화의 기로에 서 있었다. 결국 1년 계약이 아닌 3개월 단기 연장을 하기로 마음먹었을 때 미국 부동산 시장은 고점을 찍고 있었고, 우리의 마지막 렌트의 앞자리는 바뀌었다. 


세 번째 집을 떠나며 지난 6년 3개월간 우리가 월세로 쓴 돈이 얼마인지 계산해보았다. 

1년 차 800*12=9600 /2년 차 810*12=9720

3년 차 1250*12=15000 /4년 차 1330*12=15960

5년 차 1400*12=16800 /6년 차 1600*12=19200

마지막 3개월 2000*3=6000


총 $92,280을 월세로 탕진했다. 

이제는 가끔만 하게 되는 한화 계산 회로를 돌려보니 1억 하고도 천만 원이나 하는 큰돈이었다. 생전 한 번도 만져본 적 없는 돈이 지난 6년 동안 월세로 스멀스멀 나간 것이었다.

미국에서는 집을 장기 대출(모기지론)로 구입할 때 보통 집값의 20% 정도 금액을 다운페이먼트로 준비한다.

만약 미국에도 전세라는 제도가 있어서, 6년 동안 월세로 쓴 돈을 차곡차곡 모을 수 있었다면, 지금쯤 우리는 45만 불 정도의 애리조나에서 꽤나 괜찮은 집의 다운페이를 마련할 수 있었을 것이다. 


월세를 내며 살아온 옛 집을 떠올리면 모두 그 집만의 고유한 아름다움과 그 시절이 가지는 특유의 즐거움으로 가슴 한편이 몽글몽글 해진다. 하지만 월세로 1억을 쏟아부었다는 사실을 떠올림과 동시에 지난 6년이 답답함과 후회로 텁텁해지기도 한다.  최근 2년 사이에 믿기 어려울 만큼 올라버린 집값을 보고 있노라면 하루라도 빨리 집을 사지 않고 애꿎은 월세만 공중에 흩뿌린 내가 그렇게 미울 수가 없다.


결혼과 함께 시작된 미국 생활이 6년 3개월이 흘렀다. 가진 건 별로 없지만 둘이 함께 차근차근 일구어 나가자던 신혼 초의 다짐이 생각난다. 한 방에 인생이 풀리는 행운은 없었지만, 한 단계씩 나름의 레벨업을 해나갔으니 그 다짐이 마냥 헛된 것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집의 문제에서만은 우리는 매달 월세에 허덕이는 제자리걸음 중이었다. 미국에도 전세제도가 있어서 6년간 저축이라도 좀 했다면, 더 이상 신혼이라고 하기도 어중간해진 결혼 7년 차, 3인 가족의 삶은 지금보다 조금 더 윤택하고 집 없는 씁쓸함도 좀 덜 했을까?

이 제자리걸음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만 하는지 고민이 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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