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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소정 Dec 29. 2017

추억이 가난한 어른으로 남고 싶지 않은 오늘의 일기.

초등학생 시절에 나에게 가장 싫어하는 것이 무엇이냐 물으면, 단연코 ‘일기 쓰기’라고 대답했다. 일주일에 두 세 번, 빨간색 펜이  군데군데 묻어서 돌아온 내 일기장은 일 년에도 여러 번 바뀌었다. 매번 잃어버리기 일쑤였고, 밀린 일기를 써야하는데 학교에 두고 온 날이면 집에서 쓰다 남은 공책 앞면을 북북 찢어 일기장으로 사용했다. 당연히 애정을 가질 시간도, 이유도 없었다. 글 쓰는 게 싫었고, 매일매일 나에게 주어지는 의무감이 싫었다. 그래서 안타깝게도 나는 어린 시절 일기장 한 권 갖지 못한 추억이 가난한 어른이 되었다.




글쓰기와 일기를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던 나는, 성인이 되고서도 한참 뒤에 내 손으로 일기장을 샀고, 일년 반 남짓한 시간 동안 한 권을 써내려갔다. 반절쯤 썼을 무렵, 나는 내가 써내려 온 일기를 다시 읽었다. 제대로 일기를 쓰는 것은 처음인지라, 나를 드러내는 것이 너무나도 부끄러웠던 24살의 나는, 정황 설명 없이 감정만을 쏟아냈다. 혹은 앞뒤 없는 생각을 토했다. 그리고 다시 앞장을 폈던 그 날, 모든 것이 날아간 채로 껍데기만 남아있었다.




아무리 기억해내려 해도 정확히 어떤 맥락에서 나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왜 그런 감정을 느꼈는지,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알 수 없게 되자 내가 어떻게 자라왔는지조차 알 길이 없었다. 기억은 너무나도 빨리 휘발된다. 그 기억을 조금이라도 내 눈앞에 붙잡고자 일기를 쓰기 시작했는데, 글자 몇 자만 남아있는 채로, 다시 모두 날아가 버렸다. 나를 드러내는 게 부끄러워서, 조금 더 멋진 말로 함축적인 표현이 하고 싶어서 적어내려갔던 그 몇글자 때문에 나는 또 수백일의 시간을 잃었다.




이와 같은 일을 겪은 이후로, 나는 더 촌스럽더라도 상세한 일기를 남긴다. 내가 일기를 쓰는 그 날의 기분과 기억과, 주위 상황을 꼼꼼히 살핀다. 글을 깔끔하게 줄이고, 멋드러진 비유로 그 날을 묘사하는 것은 당연히 멋진 일이지만, 짧은 내 글솜씨로는 차라리 길고 지저분하더라도 구구절절한 일기를 쓰는 것이 낫다. 이 일기가 진짜 나를 보여준다. 혹시나 누군가 나처럼 멋만 부리는 일기를 쓰느라 자신을 잃은 사람이 있다면, 그래서 혹시나 잃어버린 시간이 너무나 아쉽다면, 나의 오늘 이 글처럼 그저 주절대는 글을 같이 써보자고 말하고 싶다. 써보고, 아니면 말고. 아니어서 그만 썼는데 시간이 지나고 주절주절한 일기를 읽고는, 다시 써보고 싶으면 다시 써보고. 그냥 그런 거였다. 일기란 게 그냥 그런 거였다. 남들에게 보여주지도 않을 부분까지 남의 시선을 신경써가며 멋부리고 가식을 끌어다가 쓰느라 힘이 잔뜩 들어갈 필요가 없었던 것. 불면 날아갈 정도로 가볍고,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날 것의 글이 결국은 나의 어제와 그저께를 누구보다도 무겁게 바쳐주게 되는 것.




내가 인스타그램에 글을 쓰지 못하고 고민하던 때에 브런치로 넘어 온 이유도 이와 같았다. 나는 인스타그램에서 읽기 쉬운 짧고 여운을 남기는 글을 쓰지 못한다. 주절주절. 주절주절한 글에는 끊어 읽고 붙여 읽고 하는 호흡이 중요한데 인스타그램으로는 호흡조절이 안된다. 내가 넣고 싶은 위치에 사진을 넣고, 간격을 넣어가며, 나는 오늘도 이 촌스러운 글을 이 공간에 남긴다. 브런치를 일기장 삼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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