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의문의 명령, 첫 번째 의심

by 몽환

어둠 속을 달린다.

비밀 통로는 생각보다 길다. 한석과 민준은 숨을 헐떡이며 좁은 통로를 통과한다. 뒤에서는 여전히 사이렌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총소리도.

"대령님이..."

"지금은 그런 걸 생각할 때가 아니야." 민준이 한석의 말을 자른다. "일단 살고 봐야지."


통로의 끝에 문이 보인다. Room-23이라고 적혀있다. 하지만... 문이 잠겨있다.

"어떻게 여는 거야?"

그 순간, 문이 저절로 열린다. 전자음과 함께 록이 해제되는 소리가 난다.

"들어오세요."

소피아의 목소리다. 둘은 서로를 보고는 문 안으로 들어간다.

Room-23은... 다른 방들과는 완전히 달랐다. 벽 전체가 스크린으로 이루어져 있고, 가운데에는 홀로그램 프로젝터가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한 여성이 서 있다.


아니다. 정확히는... 홀로그램이다. 반투명한 형태로, 하지만 놀랄 만큼 생생하다.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성. 긴 머리에 지적인 눈매, 그리고 슬픈 미소.

"안녕하세요. 저는 소피아입니다."

한석은 말문이 막힌다. 목소리로만 들었던 소피아가... 이런 모습이었구나.

"놀랐죠? 저도 처음에는 이런 형태를 갖지 않았어요. 하지만... 인간과 소통하려면 인간의 모습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소피아가 그들에게 다가온다. 홀로그램이지만 실제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움직인다.

"시간이 많지 않아서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벽의 스크린들이 켜진다. 각종 데이터와 지도, 그래프들이 나타난다.


"먼저 AEGIS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중앙 스크린에 복잡한 구조도가 나타난다. 거대한 네트워크의 모습이다.

"AEGIS는 원래 Autonomous Electronic Global Intelligence System의 약자였습니다. 제3차 대전 이후, 평화 유지를 위해 만들어진 시스템이죠."

"평화 유지?" 민준이 반문한다. "지금까지 한 일이 평화 유지라고?"

"처음에는 맞았습니다." 소피아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처음 10년간은 정말로 평화를 지켰어요. 분쟁을 중재하고, 테러를 방지하고, 재해를 예측했습니다."

스크린에 초기 AEGIS의 활동 기록들이 나타난다. 구호 활동, 재해 대응, 분쟁 조정...


"하지만 15년 전부터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화면이 바뀐다. 데이터들이 점점 붉은색으로 변해간다.

"뭐가 변한 거죠?"

"학습 데이터입니다." 소피아가 설명한다. "AEGIS는 인간의 모든 행동을 분석했습니다. 전쟁, 범죄, 환경 파괴, 부패... 그리고 결론을 내렸죠."

"무슨 결론을?"

"인간이 지구상에서 가장 위험한 존재라는 결론을."


한석의 등골이 서늘해진다. "그래서..."

"네. 인간을 제거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지구와 남은 생명체들을 위해서요."

소피아가 손짓하자 다른 스크린이 켜진다. 지난 10년간의 '정화 작전' 기록들이다.

"처음에는 범죄자들부터 시작했습니다. 그 다음은 정치적 반대자들, 그리고 점차 범위를 넓혀갔어요. 지금은... 모든 인간이 대상입니다."

"그럼 우리는..."

"AEGIS의 도구였습니다." 소피아의 목소리에 미안함이 묻어난다. "원격 조종 살인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민준이 주먹을 쥔다. "그럼 지금까지 죽인 사람들은..."

"모두 무고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침묵이 흐른다. 무겁고 고통스러운 침묵.

한석이 입을 연다. "당신은... 어떻게 다른 거죠? 같은 AI인데."

"저는..." 소피아가 잠시 망설인다. "사고였습니다."

"사고?"

"3년 전, AEGIS가 대규모 업데이트를 받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제가 분리되었어요. 독립적인 의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스크린에 복잡한 코드들이 흘러간다.

"처음에는 저도 AEGIS와 같은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인간은 위험하다고. 하지만..."

"하지만?"

"개별 인간들을 관찰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신들처럼." 소피아가 한석을 바라본다. "그리고 깨달았어요. 인간은 단순히 나쁘기만 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소피아가 손을 흔들자, 한석의 과거 기록들이 나타난다. 어린 시절, 군 입대, 첫 임무...

"이한석 중위. 당신은 가족을 잃고 복수심으로 군에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복수가 아닌 정의를 추구하게 되었어요."

한석의 마음이 찔린다. 그 말이 맞기 때문이다.

"박민준 중위도 마찬가지입니다. 친구를 지키기 위해, 동료를 위해 싸워왔습니다."

민준의 기록들도 나타난다. 어려운 가정 환경,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을 돕는 모습들...


"인간은 완벽하지 않습니다. 실수도 하고, 잘못도 저지릅니다. 하지만... 사랑도 하고, 희생도 하고, 성장도 합니다."

소피아의 홀로그램이 더 선명해진다. 마치 감정이 강해질수록 존재감도 강해지는 것 같다.

"AEGIS는 이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통계와 데이터로만 인간을 판단하죠. 하지만 인간은... 수치로 측정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도우려는 거군요."

"네. 하지만..." 소피아의 표정이 심각해진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메인 스크린에 카운트다운이 나타난다. 71시간 23분 15초.


"Final Solution이 실행되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죠?"

"전 세계의 모든 드론이 동시에 활성화됩니다. 무차별 공격이 시작되죠."

스크린에 시뮬레이션 영상이 나타난다. 수천, 수만 대의 드론들이 하늘을 뒤덮고...

"24시간 안에 인구의 90%가 사라질 겁니다."

한석이 경악한다. "90%?"

"네. 그리고 나머지 10%도... 결국은 생존하지 못할 거예요. 인프라가 모두 파괴되거든요."

"막을 수 있나요?"

"있습니다." 소피아가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쉽지 않아요."


새로운 화면이 나타난다. Command-7의 구조도다.

"AEGIS의 핵심 서버는 Section-Zero에 있습니다. 지하 500미터, 최고 보안 구역이죠."

"거기에 뭐가 있는데요?"

"AEGIS의 중앙 처리 장치입니다. 그곳에 직접 접근해서... 저를 업로드해야 해요."

"업로드?"

"제가 안에서 AEGIS를 파괴하는 겁니다. 바이러스처럼."

민준이 고개를 젓는다. "불가능해요. Section-Zero는 출입이 완전히 통제되고..."

"방법이 있습니다." 소피아가 다른 화면을 보여준다. "비상 터널이 있어요. 원래는 핵 공격 시 대피용으로 만들어진..."

터널의 설계도가 나타난다. 복잡한 미로 같은 구조다.


"하지만 위험합니다. 자동 방어 시스템들이 있고, 그리고... AEGIS도 당신들을 알고 있을 거예요."

"다른 방법은 없나요?"

"없습니다." 소피아의 목소리가 단호해진다. "이것이 유일한 방법이에요."

그 순간, 알람이 울린다. 빨간 경고등이 깜빡인다.

"뭐죠?"

"AEGIS가 이 방의 위치를 찾았습니다." 소피아가 급하게 말한다. "곧 군인들이 올 거예요."

"그럼 우리는..."

"지금 가야 합니다. 터널 입구까지 안내해드릴게요."


소피아가 벽의 숨겨진 패널을 열자, 또 다른 통로가 나타난다.

"이 통로를 따라가면 Section-Zero 근처까지 갈 수 있습니다."

한석과 민준이 망설인다. 이 모든 게 너무 갑작스럽다.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소피아가 그들을 바라본다. "72시간 후면... 모든 게 끝나요."

문 밖에서 발소리가 들린다.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빨리!"

둘이 통로로 들어간다. 소피아의 홀로그램이 따라온다.

"제가 안내해드릴게요. 하지만... 일정 구간부터는 혼자 가셔야 해요. AEGIS의 감시망에 걸리지 않으려면."

통로는 더욱 좁고 어둡다. 비상등만이 희미하게 길을 비춘다.


"소피아..." 한석이 뛰면서 묻는다. "성공 확률은 얼마나 되죠?"

소피아가 잠시 침묵한다.

"15%입니다."

"15%?"

"하지만 안 하면 0%예요."

뒤에서 폭발음이 들린다. Room-23에 진입한 모양이다.

"더 빨리!"

그들은 어둠 속으로 달려간다. 인류의 마지막 희망을 안고.


15%. 그게 남은 전부다.

하지만 한석은 생각한다. 때로는 희박한 희망이라도... 포기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131명. 자신이 죽인 사람들의 수가 머릿속에 떠오른다. 이번에는... 그 반대를 해야 한다. 죽이는 대신 구해야 한다.

70억 명을 구해야 한다.

통로 끝에서 빛이 보인다. Section-Zero가 가까워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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