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밤은 깊었고, 남극의 얼음 대지는 침묵에 잠겨 있었다. 아니, 잠겨 있었다기보다는, 거대한 존재의 숨통이 서서히 조여드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늘엔 오로라가 녹색과 보라색의 물감처럼 번져 있었지만, 그 아름다움은 위협적인 침묵을 가리려는 얇은 장막에 불과했다. 바람은 칼날 같았고, 얼어붙은 대기는 폐부 깊숙이 스며들어 모든 것을 얼어붙게 할 기세였다. 이곳, 인류의 발길이 닿지 않던 미지의 땅에 윤하와 선우는 서 있었다. 정확히는 '노틸러스'호의 자동화된 탐사정 안에 몸을 싣고, 수백 미터 아래 얼음 구멍 속으로 천천히 하강하고 있었다.
"수온 변화 그래프가 심상치 않아요, 윤하 씨."
선우의 낮은 목소리가 좁은 탐사정 안을 울렸다. 그의 시선은 콘솔 화면의 복잡한 데이터에 고정되어 있었다. 지반 공학자로서 그는 언제나 숫자를 신뢰했고, 그 숫자들이 경고하는 바는 명확했다. 남극 심층부의 빙하는 상상할 수 없는 속도로 녹아내리고 있었다. 그들은 이미 지난 몇 주간 수없이 많은 '예외적인' 데이터를 목격했다. 인류가 예측했던 모든 기후 모델을 비웃기라도 하듯, 빙하는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잃어가고 있었다. 윤하는 선우의 말없이 굳은 표정에서 그의 걱정을 읽었다.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해양 고고학자로서 수많은 침몰선을 탐사했지만, 지금 이 순간의 공포는 차원이 달랐다. 이건 과거의 비극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인 미래의 서막이었다.
"진동 감지 센서도 계속 이상 신호를 보내네요. 지반 깊은 곳에서 뭔가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단순한 빙하의 균열은 아닌 것 같아요."
선우의 목소리에 미세한 떨림이 섞였다. 보통의 상황이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얼음 속 거대한 구조물의 존재를 암시하는 데이터였다. 지난 수만 년간 단 한 번도 태양을 보지 못했던 심해의 얼음층이, 이제 그 깊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윤하는 침묵했다. 아니, 할 말을 잃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탐사정의 거대한 창밖으로 펼쳐진 풍경은 마치 다른 행성에 온 것만 같았다.
수십만 년 동안 얼어붙어 있던 과거의 시간이, 지금 이 순간 녹아내리고 있었다. 그 안에서, 분명 무언가가 깨어나고 있었다. 그들은 인류에게 전례 없는 기회를 가져다줄 지혜일 수도 있고, 아니면 존재조차 몰랐던 파멸의 씨앗일 수도 있는, 미지의 존재와 마주할 참이었다.
탐사정의 불빛이 어둠 속으로 더욱 깊숙이 파고들었다. 차가운 물속을 가르며 내려가는 동안, 윤하의 머릿속에는 강 박사의 경고가 맴돌았다.
"우리는 문을 열고 있는지도 몰라. 인류가 감당할 수 없을지도 모르는 문을." 그 말의 무게가 현실로 다가오는 듯했다. 그러나 후회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이미 빙하는 녹기 시작했고, 과거는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피할 수 없는 미래 앞에서, 인류는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 윤하는 꽉 움켜쥔 주먹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손안에는 차가운 금속 조각이 들려 있었다.
남극 탐사를 떠나기 전, 침수된 서울의 한 유적지에서 발견된, 정체를 알 수 없는 고대 유물의 파편이었다. 이 파편과 지금 그들이 향하는 빙하 속 미지의 존재 사이에 어떤 연결고리가 있을까. 그들은 알지 못했다. 다만, 이제 막 시작된 '녹아내린 시간' 속으로, 거침없이 빠져들고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