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얼음의 경고
'노틸러스'호의 내부에서조차 남극의 추위는 고스란히 느껴졌다. 외벽을 타고 흐르는 얼음 결정이 유리창에 서리처럼 맺혔고, 주기적으로 들려오는 빙하의 으스스한 마찰음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긴장감을 불러일으켰다. 선우는 두꺼운 장갑을 낀 손으로 탐사정의 조작 패널을 능숙하게 다루며 깊어지는 수심을 주시했다.
그의 미간에는 언제나처럼 미세한 주름이 잡혀 있었는데, 이는 집중의 표시이자 동시에 알 수 없는 불안감의 반영이기도 했다. 옆자리에서 홀로그램 지도와 고고학 데이터들을 꼼꼼히 살피던 윤하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벌써 500미터가 넘었네요. 이 정도면 우리가 예상했던 균열 지점에 거의 다 온 것 같아요."
윤하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억누르기 힘든 기대감과 함께 미묘한 전율이 스며 있었다. 그녀의 눈은 반짝였고, 마치 잃어버린 조각을 찾아 헤매는 고고학자처럼 보였다. 선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전방 스크린에 나타난 지반 스캔 데이터를 확대했다.
"데이터상으로는 가장 안정적이라고 판단했던 지점인데… 예상보다 지반의 취약성이 심각합니다. 해저 지진 활동이 평소보다 활발해요. 이 깊이에서 이런 규모의 마찰음이 들린다는 건…."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지반 공학자로서 그의 직감은 이 거대한 얼음 덩어리가 단순히 녹아내리는 것을 넘어, 심각한 구조적 변화를 겪고 있음을 경고하고 있었다. 과거 예측 오류로 인한 트라우마는 그를 더욱 신중하게 만들었다. 혹시라도 그의 분석이 틀려 더 큰 재앙을 불러올까 봐, 매 순간 숫자에 집착했다.
윤하는 선우의 예민한 반응을 눈치챘다. 그가 가진 과거의 무게를 알기에, 그녀는 섣불리 위로의 말을 건네지 않았다. 대신, 고고학자 특유의 차분한 목소리로 현재 상황에 집중하려 했다. "이런 환경에서 지반이 안정적이라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일지도 모르죠. 어쩌면 그 불안정함이 우리가 찾던 답의 일부일 수도 있고요."
선우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희망적인 관점이시군요. 하지만 제 입장에선 매초 지진계의 경고음이 들리는 기분입니다. 혹시 모를 붕괴에 대비해 비상 탈출 경로를 다시 확인해야 합니다."
그는 늘 그렇게 현실적이고 냉철했다. 윤하의 추상적인 호기심과 달리, 선우의 모든 관심은 데이터와 안전, 그리고 구조적 안정성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들의 성격 차이는 팀 내에서도 종종 화제가 되곤 했다. 한 명은 미지의 과거를 파헤치고, 다른 한 명은 현재의 지반 위에 미래를 건설하려 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상반된 관점이 시너지를 만들며 복잡한 문제의 해답을 찾아가는 열쇠가 되었다.
바로 그때, 탐사정의 수신 장치에서 기이한 노이즈가 들려왔다. 단순한 잡음이 아니었다. 어떤 패턴을 가진 것처럼 느껴지는, 반복적이고 불규칙적인 소리였다. 마치 저 먼 심연 어딘가에서 누군가 도움을 요청하는 듯한, 혹은 경고하는 듯한 메아리 같았다.
"무슨 소리죠?" 윤하가 눈을 크게 떴다. 선우는 곧바로 음향 분석 프로그램을 가동했다. 스크린에 나타난 파형은 기이한 형태를 띠고 있었다. "자연적인 소리는 아닌 것 같습니다. 빙하의 마찰음이나 해양 생물의 소리 패턴과는 전혀 다릅니다. 인공적인… 아니, 살아있는 어떤 신호 같아요."
그 순간, 탐사정의 전면 스크린 너머로 거대한 그림자가 아른거렸다. 그것은 차갑고 푸른 어둠 속에 잠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광경이었다. 빙하의 거대한 단층 아래, 마치 누군가 칼로 도려낸 듯한 완벽한 원형의 균열이 드러났다. 그 안은 더욱 깊은 심연으로 이어져 있었고, 그곳에서 미약한 빛이 깜빡이는 것을 윤하는 똑똑히 보았다.
"저게… 저게 뭐죠?" 윤하의 목소리가 떨렸다. 해양 고고학자로서 그녀는 수많은 유적과 유물을 보았지만, 이런 압도적인 존재감은 처음이었다. 마치 오랜 시간 숨죽여 기다리던 거대한 생명체가 비로소 눈을 뜨는 것 같았다.
선우는 스크린의 수심계를 확인했다. "저긴… 우리가 탐사하기로 했던 심도보다 훨씬 깊습니다. 게다가 저 구조물은 자연적으로 형성될 수 있는 형태가 아니에요. 인공 구조물입니다. 빙하 밑에 숨겨져 있던…."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탐사정이 크게 흔들렸다. 지진 경고음이 맹렬하게 울려 퍼졌고, 선우가 다급하게 패널을 조작했다. "지반이… 붕괴하고 있습니다! 저 원형 구조물 주변의 지반이 엄청난 속도로 녹아내리고 있어요!"
차오르는 물, 무너져 내리는 얼음 파편들이 탐사정을 덮칠 듯했다. 거대한 얼음 덩어리들이 심연 속으로 빨려 들어가며 공포스러운 소용돌이를 만들어냈다. 윤하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수만 년의 세월이 응축된 빙하가, 마치 거대한 유기체처럼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 순간, 그녀의 손에 쥐여 있던 고대 유물의 파편이 갑자기 뜨겁게 달아올랐다. 파편에서 미약한 진동이 느껴졌고, 희미한 푸른 빛이 새어 나왔다. 마치 오랜 시간 잠들어 있던 무언가가, 동족의 존재를 감지하고 반응하는 것처럼.
"선우 씨, 이거 봐요!" 윤하가 손에 든 파편을 내밀었지만, 선우는 이미 필사적으로 탐사정을 조종하고 있었다. "버틸 수가 없습니다! 엔진 최대 출력! 후퇴해야 합니다, 윤하 씨!"
그러나 이미 늦었다. 균열은 삽시간에 거대한 구렁텅이로 변했고, 탐사정은 항력을 잃고 거대한 심연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선우는 마지막까지 균형을 잡으려 애썼지만, 무너져 내리는 얼음의 무게는 탐사정의 한계를 아득히 넘어섰다. 기계음과 함께 모든 전원이 꺼졌다.
암흑이 찾아왔고, 오직 윤하 손안의 유물 파편에서 새어 나오는 희미한 푸른빛만이 그들을 감쌌다. 차갑고 깊은 어둠 속으로, 그들은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로 추락하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추락이 아니었다. '녹아내린 시간'이 그들을 과거의 문으로 이끄는, 거대한 운명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