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게 씩 밖에는 쓸 수 없다. J가 혈액암이라고 했다. 호주로 가기 전 눈 밑에 났던 작은 뾰루지가 일 년이 지나도 없어지지 않아 검사해보니 림프성 종양이었다고 했다. 치료가 끝나 이제는 잘 쉬기만 하면 된다고 덤덤히 말했지만 마음이 좋지 않았다. K는 L의 결혼식 때 J가 많이 아파 보였다고 했다. 손을 꽉 잡고 있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S가 와인을 마시러 집 근처로 오라고 했다. S의 언니가 찾아낸 와인바에는 조금씩 다양하게 시켜 먹을 수 있는 별로 비싸지 않은 안주들이 많았다. S는 꼬질꼬질하고 표지가 덜렁거리는 소설책 한 권을 들고 나왔는데 예전에 내게 추천해주고 싶다고 했던 책이었다. 요즘 세대들은 다 이렇게 쓰는 줄 알았다고, 그런데 다른 책들을 찾아보니 아니더라고 했다. 한국 작가들의 책은 거의 안 읽는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아무 데나 펴서 몇 줄을 읽었는데 시원하고 재밌게 읽혔다.
S에게 오랫동안 생각해오던 길에 대한 비유를 말했다. 이제 나도 나이 서른이라는 사실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단지 질문들일 뿐인 질문들. 둘이서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 떠오르는 말들을 아무렇게나 지껄이고 시시덕거릴 수 있어서 좋았다.
처음 K의 차를 타봤다. 그의 제안으로 저녁을 먹은 뒤 용산에 있는 아모레퍼시픽 신사옥을 보러 갔다. 약간 공항 대합실 같은 별로 개성 없는 공간이라고 생각했다. 슈투트가르트 도서관의 느낌도 조금 났다. 한국에서는 줄눈을 맞춘 건물을 처음 보는 것 같았다. 2층 아카이브의 가구가 근사했다. K의 말로는 문고리 하나가 수백만 원짜리라고 했다. 치퍼필드 같은 건축가도 설계로는 돈이 안되니 문고리를 찍어 팔아야 하는 걸까? 거대한 건물은 깔끔했지만 정갈하지는 않았다.
음악의 기쁨에서 브람스에 대한 부분을 읽고 가족에게 보낼 편지를 썼다. 도서관이 9시까지 연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이상하게도 이제껏 주중 저녁에는 도서관에 갈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곳은 넓지는 않지만 쾌적하다. 나는 그 공간을 한쪽 구석에서 정신적으로 즐길 수 있다. 마치 빛이 반만 비치는 차양 앞에서 그 뒤에 창문이 있다는 사실이 마음의 안정을 주는 것처럼.
근시가 조금 심해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