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일기

2019. 1. 19 토

by 홍석범

오후 두 시. 뚱뚱한 여자가 내 앞에서 옷을 벗고 있다. 바지를 내리고 놀랍게도 그다음에는 흰 팬티까지 벗었는데 나와 그녀 사이로 배낭을 멘 젊은 남자들이 지나갔다. 수영복으로 갈아입은 여자는 두 발을 물속에 담고 천천히 걸어 나가기 시작한다. 조금씩 윗옷을 추어올리면서. 하늘에서 갈매기떼가 지나갔다. 허연 항아리 같은 몸이 점점 물속으로 사라져 간다. 희한하게도 소로우가 일기에 인간은 어떤 폭풍우도 가라앉히지 못하는 코르크 마개와 같다고 썼던 것이 기억났다. 우리는 언젠가 항구에 도착할 때까지 안전하게 떠갈 것이다. 이곳의 모래는 너무 고와서 손을 대면 마치 젖어 있는 것 같다.


소설 속에 다음과 같은 문구가 있었다. 우리는 책-사랑이란 매개를 통해서만, 그것이 만들어낸 공간 속에서만 서로를 느끼고 만지고 생각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라고 말할 수 있는 관계조차 존재하지 않으리라.

내가 일기를 쓰는 것 역시 그런 맥락일까? 그건 어쩌면 사랑받고 싶은 마음일지 모른다. 일기를 쓸 때 나는 누군가에게 말하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아마도 과거의, 또는 미래의 나에게. 자아는 연속적이지 않고 단편적이다.


이곳에는 개들이 많다. 개를 키우는 사람들이 많다고 해야 할 것 같다. 베리는 얼마 전 빈 집처럼 보이는 건물의 발코니에 개 네 마리가 묶여 있는 것을 보고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싸잡아 비난했다. 올리브색 군복을 입고 어깨에 총을 멘 여자아이들은 분명 열여섯 살도 되지 않았을 거라고 말하면서. 그녀는 아주 엄격한 비건이다.


텔아비브 대학 캠퍼스에서 일행이 처음 전부 모였을 때 베리는 나에게 어딘가 달라 보인다고 말했었다. 그 말이 사실인지, 내가 정말로 달라졌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내가 다르게 느끼고 있는지조차도 나는 지금 제대로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어제 호스텔에서 잠깐 술을 마셨을 때 베리에게 S에게 했던 이야기를 똑같이 했다. 그것에 대해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기보다도 그냥 말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조금은 연극적으로. 아마도 Y를 생각하면서 나는 다소 우울한 표정을 지었고 베리는 우리가 결정을 내려야만 하는 순간들에 대해 어떤 말인가를 했다. 나는 그것을 내가 해석하고 싶은 방식대로 알아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본인이 멋지다고 생각하는 부류의 사람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것은 매력적으로 비칠 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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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앞에 바다가 있는 카페에서 카푸치노를 마시며 책을 읽다가 해가 질 때쯤 다시 해변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속초에서 봤던 수은 같은 물. 한 엄마가 제시카 차스테인을 닮은 꼬마 남자아이의 운동화 끈을 묶어준다. 꼬마는 그녀의 정수리에 뽀뽀를 한다.


껄렁거리는 힙스터 무리가 카페 푸아 전체를 차지하고 파티를 하고 있었다. 아지트를 빼앗긴 울적한 기분이 되어 호스텔로 돌아왔다.






2016. 1. 19



도면을 그릴 때의 습관


구석구석 돌아다니면서 올려다보고, 창문을 열어보고, 의자에 앉아본다. 한참을 그렇게 하면 어느새 세세한 부분까지 머릿속에 그려지고 마음에 들게 된다. 그러면 비로소 실제로 그릴 준비를 하는데, 그때는 어떻게 생겼는지 전부 아는 것을 그리는 게 이미 재미없고 귀찮아진다.


콘티를 그릴 때 하야오는 머릿속에서 장면이 충분히 확실하면 그리지 않고 그냥 넘어가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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