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일기

2019. 1. 20 일

by 홍석범

작고 흰 말 수천 마리가 달려 나오는 것 같았다. 가방을 옆에 세워 두고 뱃머리처럼 튀어나온 데크의 끄트머리에 서 있었을 때.



무던해지기 위하여 사투하는 것에 대해 안드레 아씨만, 혹은 그의 책을 영화로 각색한 제임스 아이보리는 왓 어 웨이스트 라고 썼던 것 같다. 베리반 역시 키치함을 쿨하게 웃어넘기며 진지한 목소리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고 말했다. 마음에 락스를 들이붓는 일. 그럼 내 영혼에서는 싸구려 모텔의 시트 냄새가 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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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탄불에 도착해 공항에서 시간을 때우고 있는데 D가 도대체 일주일 내내 비행기를 타고 있냐고 묻는다. 실제로 텔아비브에서의 일주일이 서울에서 슈투트가르트로 날아가는 비행기의 작은 화면 속에 들어 있는 영화 같다.






2016. 1. 20



2월까지는 너무 추워 대부분의 공사가 중단되었다. 지금 유일하게 진행 중인 탄약고 방탄문 보수공사도 원래는 3월 예정이었지만 예산 문제로 일정이 앞당겨졌다. 기 소장님은 내가 행정실로 차출되기 훨씬 전부터 이미 시설대대와 일을 해왔기 때문에 행정 담당 누구의 아버지가 어디 교수라는 둥, 사무관 누구가 이번에 진급을 했다는 둥 내부 사정에 빠삭하다. 그러나 딱히 관심이 있는 건 아니다. 그는 자주 장난을 치고 잘 챙겨주지만 무뚝뚝한 성격이다. 처음 알게 됐을 때부터 나를 스스럼없이 대했고 그래서 우리는 금방 정이 들었다. 그는 나처럼 입이 짧고 아침을 먹지 않는다. 가끔씩 골골거릴 때마다 내가 밥 좀 먹으라고 잔소리를 하면 담배만 뻑뻑 피운다. 창문을 열고 페브리즈를 뿌리려고 하면 차 안의 온갖 방향제들과 물티슈까지도 전부 꽁꽁 얼어 있다. 가끔씩 점심때가 되면 일도 없는데 뜬금없이 찾아와 짬뽕이나 먹으러 가자고 한다. 탄약고 게이트를 지날 때마다 매번 바뀌는 헌병들에게 밥은 먹었냐는 둥, 날씨가 너무 춥지 않냐는 둥 친구 부르듯 말을 붙이길래 내가 어떻게 그렇게 모르는 사람이 없냐고 묻자 씩 웃으면서 전혀 모르는 애들이라고 한다. 이것저것 물어봐서 열심히 대답을 해주면 듣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전혀 딴소리를 한다. 여자 친구와 통화를 할 때면 마냥 철부지 어린애 같다. 하루는 점심을 먹고 돌아와 보니 패스와 반듯하고 시원한 글씨로 쓴 쪽지가 남겨져 있었다. 일이 있어서 먼저 나가니 좋은 하루 보내시라고. 괜히 기분이 좋아져서 쪽지를 책 안쪽에 붙여놓으려는데 뒤에서 왔어? 하며 그가 불쑥 나타났다. 막 나가려던 참에 화장실이 급해서 다시 들어왔다고. 그리고는 쪽지를 빼앗아 내가 돌려달라고 해도 들은 체 만 체 왼손으로 구겨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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