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일기

2019. 2. 12 화

by 홍석범

마네에 대한 푸코의 분석.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그가 주관적인 관찰자로서 그에게 보이는 것을 설명한다는 것이다. 그는 마치 미술관에서 산책을 하듯 작품에서 작품으로 넘어간다.


마네가 장면을 구성하는 방식과 내가 모형 사진을 찍는 방식 사이에는 몇 가지 유사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것은 공간을 연상시키는 전략으로 마네는 캔버스라는 이차원적인 사물의 속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도리어 청중으로 하여금 그림이 아닌 그림의 바깥을 보도록 유도한다.


Was sehen sie? Wir wissen es nicht, denn das Gemälde ist genauso geschnitten, dass uns das Schauspiel, durch das ihre Blicke angezogen werden, entgeht.






2016. 2. 12



폐허 연구 보충 (문학이란 무엇인가)


세계와 사물은 비본질화되고, 그것들은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행위를 성립시키기 위한 한낱 구실이 될 따름이다. 오직 좌절만이 인간의 기도의 끝없는 전개를 장벽처럼 가로막으면서 인간을 순수한 자기 자신으로 되돌려준다. 세계는 여전히 비본질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이제는 패배의 계기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사물의 목적성은 인간의 길을 막아서 인간을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가게 하는 데 있게 된다. (폐허가 된 건물은 최고도로 사물이다.)


가령 시어는 산문의 폐허에서 솟아난다. 말은 배반이며 전달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낱말 하나하나가 그 개별성을 회복하여 우리의 패배의 도구가 되고 전달 불가능한 것의 은닉자가 될 것이다. 그것은 <달리> 전달할 만한 것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산문(실패한 도시)에 의한 전달이 좌절된 이상, 낱말의 뜻 그 자체가 순수하게 전달 불가능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전달의 실패는 전달 불가능한 것의 존재를 시사한다. (더 이상 지붕을 떠받치지 않는 기둥, 이제는 고목이 된 기둥) 낱말들을 이용하려는 기도가 어긋나면, 초탈한 입장에서 순수하게 말을 직관하려는 움직임이 뒤따른다. (폐허에서의 방랑객, 폐허에서 시작하는 직관으로서의 건축) 이런 태도의 선택이 집단 내에서의 매우 명확한 기능을 시인(건축가)에게 부여한다. 극도로 통합적이거나 종교적인 사회에서는 좌절은 국가에 의해서 은폐되거나(재개발), 반대로 종교에 의해서 다시 부각된다(해체주의). 그러나 우리의 민주주의 체제처럼 세속적이며 한결 덜 통합적인 사회에서는 시가 그것을 다시 부각하는 것이다.


직관은 침묵이며, 언어의 목적은 전달에 있다. 어떤 ‘결의’가 개입된다. 명확한 문장, 표현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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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위한 글쓰기(건축)인가?


건축(가)의 역할


1. 당신은 무슨 할 말이 있는가?


2. 당신은 어떤 변화를 가져오기를 바라는가?


3. 당신은 왜 이 이야기보다도 그 이야기를 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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