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일기

2019. 4. 17 수

by 홍석범

어제 오후 늦게 결국 몸 워크숍을 놓치고 짜증 난 상태로 집에 돌아오면서 내일 아침 여덟 시 반에 전철을 타고 존넨베르크까지 가는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나를 위안했다. 그리고 바보 같은 짓이었지만 오늘 실제로 그렇게 했다. 브루탈리스트 건물을 또 하나 본다고 크게 달라질 것은 없다고. 무엇보다 시간이 조금 필요했다.


텍스트를 읽다가 어제 자기 전 마음먹었던 대로 도살장에 있는 성령 교회로 갔다. 성스러운 괴물을 만나기 위해. 건물은 거의 폐가나 다름없었다. 예배당으로 들어갔는데 생각보다 아늑했다. 천창을 통해 대각선으로 인상적인 빛이 떨어졌다. 제단 뒤편의 십자가상은 보라색 벨벳 천으로 덮여 있었고 한 몸으로 굳혀져 무늬가 새겨진 촛대들과 강대상의 디테일 역시 훌륭했다. 거의 완전한 정적 속에서 나는 그 공간을 좋아하게 됐다. 두 번째 입구와 계단실로 통하는 유리문은 잠겨 있었지만 한쪽 걸쇠를 올리고 양쪽 문을 동시에 밀자 쉽게 열렸다. 두 층의 지하실은 약간 음산했다. 지하 2층은 빛이 아예 들어오지 않았고 그나마 양쪽으로 창문이 있는 지하 1층은 거의 사용되고 있지 않은 듯했는데, 사용한다 하더라도 다소 인위적이고 불편한 구조였다. 위의 두 층에는 아마도 이민자들이 거주하고 있는 작은 집들이 있었다. 다시 예배당으로 돌아왔을 때 인상적인 대각선의 빛은 사라지고 따듯했던 색들은 힘을 잃은 채로 후퇴해버렸다. 신자석 뒤에 쌓여 있는 ‘EIN ZEICHEN UNSERER ZEIT, Flucht - Vertreibung - Migration’이라는 제목의 팸플릿을 들고 나왔다.


실제로 교회를 보고 온 뒤에 어떤 이야기인가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을 느꼈다. 무엇보다 그 이야기의 제목을 우연히 발견했던 며칠 전 이후로 마음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2016. 4. 17



비가 온다. 비트겐슈타인의 수학의 기초를 다 읽었다. 벚꽃들이 벌써 꽤 많이 졌다. 다음 주까지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바람이 불면 새끼손톱만 한 꽃잎들이 함박눈처럼 내린다. 공간은 서늘하고 넓고 사람들은 조용하다. 왜인지 오랜만에 일기를 쓰는 느낌이다.

매거진의 이전글2019. 4. 15 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