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나의 공연을 보기 위해 또다시 부퍼탈에 다녀왔다. 돌아오는 길에는 고생을 좀 했다. 뒤셀도르프에서 갈아타야 하는 기차가 한 시간 반 연착했고 결함이 있던 그 기차는 그 이후로도 계속 시간을 갉아먹으며 느린 속도로 달렸다. 슈투트가르트에 도착했어야 하는 새벽 네 시 반에 기차는 겨우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했는데 결국 그곳에서 비몽사몽간의 승객들은 전부 다른 기차로 옮겨 타야 했다. 칼스루에에서 다시 한 시간을 기다려 또 한 번 기차를 갈아타 슈투트가르트에 도착했다. 단 두 시간을 위한 왕복 열네 시간의 지난한 여정이었지만 며칠이 지난 후 역시 잘 다녀왔다고 생각한다. 작년 카페 뮐러를 보러 갔을 때의 부퍼탈도 이번처럼 어둡고 축축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눅눅함이 베어나는 그 밤은 엔진이 고장 난 기차가 계속 연착 시간을 늘려가며 어딘가로 느리게 달려가기에 적격인 밤이다.
이끼는 피나가 죽기 전 마지막 작품이다. 그녀와 그녀의 댄서들은 함께 칠레를 다녀온 뒤 이 작품을 만들었다.
여자들이 상체를 뒤로 젖히고 팔을 벌려 양손에서 작은 돌멩이를 떨어뜨린다. 한 여자가 춤을 추기 시작하고 무대는 점점 조각난다. 여자를 번쩍 들어 올린 남자들이 여기저기서 걸어 나온다. 모두가 한 줄로 누워 B는 A의, C는 B의, D는 C의 머리를 만진다. 다 함께 천천히 손뼉을 친다.
이런 모습들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단편적인 장면들과 소리들. 알록달록한 드레스의 색깔들. 지속적이기도 간헐적이기도 한 움직임들.
춤은 사라진다고 말하면 진부하겠지만 그것은 사실이고 또한 신비로운 사실이다.
피나의 댄서들이 그들의 몸으로 마치 수화 같은 춤을 추는 것을 보면서 묘하게도 글을 쓰는 모습을 떠올렸다. 블랑쇼가 문학의 공간이라고 불렀던 그 절대 고독, 아무것도 아님의 공간이 춤의 공간일 수 있을까? 이걸 쓰면서 나는 그렇다는 확신이 든다. 춤은 분명 밖이 아닌 안으로 향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