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이 끝나고 나오면서 엘레나와 나눈 대화. E. 5일 내내 여덟 시간씩 일하는 건 상상할 수 없어. 나는 아마 버티지 못할 거야. H. 그건 지금의 너고, 졸업한 후에는 달라질 거야. 그때 일을 하는 너는 다른 상황이니까. E. 하지만 필립과 니클라스를 봐. 졸업해도 힘든 건 마찬가지야. H. 나는 오히려 학교가 끝나면 당분간은 자유로울 것 같아. 어쩌면 진짜로 내 시간이 생길지도 모르지. E. 어쩐지 조금 모순적인데. 게다가 이곳은 최저 시급이잖아. 다른 곳은 인턴들에게 12유로씩 준다는 말도 들었어. 너는 대체 얼마를 받아? H. 나도 최저 시급이지. E. 9.19유로? 넌 석사 중인 데도? H. 그래도 아무것도 모르는 건 비슷할걸. 그리고 여긴 상대적으로 자유롭고 부담이 없잖아. E. 내 친구는 이전 사무실에서 15유로까지도 받았다던데. H. 그 친구는 뭘 했는데? E. 구조 설계 경험이 있어서 좀 책임감이 큰 일을 맡긴 했었다나 봐. H. 거봐, 일을 한 만큼 받았겠지. 나는 차라리 덜 받고 책임도 덜 지는 쪽을 택하겠어. E. 언제까지나 그럴 수는 없잖아. H. 물론이지. 졸업하면 상황은 달라지겠지. 아까 내가 한 말이 그 말이야. 그때의 우리는 다를 거고 우리의 상황도 다를 테니 우리의 사고도 마음가짐도 달라지겠지. 답보 상태일 수도 있겠지만.
이 대화를 들었다면 프라우 리는 나를 데려온 일을 후회했을까? 그렇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녀도 지금 일이 나에게 우선순위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내 앞으로 주어진 일은 열심히 해내려고 노력하고 있다. 최소한 꾀는 부리지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한다. 그러나 능력을 키워 큰일을 해내려고 힘을 쏟지도 않는다. 실망시키고 싶지도 않지만 기대 이상을 해 보이고 싶은 욕심도 없다. 그 사실을 전제하더라도 이 대화는 내가 얼마나 이상주의적이고 막연하며 동시에 자신의 능력에 회의적인지를 보여준다. 혼자 오랜 기간 공을 들여 만들어 놓은 나른한 안갯속에 안주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