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일기

2020. 2. 23 일

by 홍석범

K는 몬스터를 보고 내가 소설을 쓰기 위해 건축을 사용한 것 같다고 했다. 건축과 건물을 짓는 행위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건물을 지음으로써 건축에 기여한다. 마찬가지로 소설을 씀으로써 건축에 기여할 수도 있다. 나에게 가장 합당하게 느껴지는 건축의 정의는 구축의 사유이다. 그 교차 대구인 사유의 구축과의 원환성, 즉 구축에 대한 사유는 동시에 사유를 구축하는 바로 그 행위 자체라는 신비로운 사실은 나로 하여금 건축하는 행위에 세계에 대한 일말의 진실을 드러내거나 감출 수 있는 힘이 있다고 믿게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K가 지적한 바대로 우리 둘 모두에게, 특히 나에게 건축은 매개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실제로 언제부터인가 특정한 건물은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건물을 설계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다. 죌크 교수가 은유로서의 건축이라고 했던 말은 이 의미였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무엇을 은유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것은 세계에 대한 일말의 진실이었을까? 독일에서 처음으로 작업했던 도로테아에서 스토아의 끝없이 길고 관대한 갤러리를 상상하면서 남자와 여자의 교환, 작가와 작가의 교환, 예술과 인간 또는 자연과 인간의 교환을 주제로 내세웠을 때 나는 어쨌든 무엇인가를 이야기하고 싶었고 그 내용은 종국에 다소 과장적인 어떠한 건물의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 말하자면 그것은 교환이 건물이 된 것, 혹은 사막이 건물이 된 것이다.


무엇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행위라는 점에서 이러한 건축을 통한 은유법은 내가 사물을 파악하고 사물과 대면하게 되는 방식이다. 그리고 보르헤스가 어린 시절 아버지의 서재에서 수많은 사물들을 문학을 통해 처음 알게 됐던 것처럼 이러한 은유법이 소설의 형식과 합치되게 되는 것은 필연적인 수순이다. 소설의 유일한 주제는 세계라는 사물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건축에서 또한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 도서관이라는 사물에 대해 무엇인가를 말해야 한다면 누군가는 그것에 대한 이야기를 쓸 것이고 누군가는 그것을 지을 것이다. 건축에 기여함에 대해 무엇인가를 말해야 한다면 시인은 시를 통해 언어에 기여한다고 말하는 것으로 족하다. 칸은 건물을 지음으로써 건축에 기여했고 헤이덕은 K의 단어를 빌리자면 소설을 씀으로써 건축에 기여했다.

매거진의 이전글2020. 2. 19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