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일기

2020. 8. 8 토

by 홍석범

어제 오후 다섯 시쯤 침대에 누워 정신을 완전히 놓아버리기 전에 어떤 형용할 수 없는 나른함과 홀가분함을 느꼈다. 육 개월 동안 방치되어 있던 사물들의 분위기는 여유롭고 조용하다. 먼지가 쌓이지 않은 것은 기적이라고 생각했다. 상상했던 대로 우편함은 온갖 광고와 싸구려 잡지들로 꽉 차 있었지만 다행히 중요한 편지들은 분실되지 않았다. 학교에서 보내온 졸업 축하 편지 역시 다른 쓰레기들 사이에 구겨진 채로 처박혀 있었다. 교수들의 얼굴이 나온 줌 스크린샷을 모아 인쇄한 다소 대충 만든 듯한 그 구겨진 편지를 찍어 이반에게 보냈더니 2020년을 요약해 주는 사진이라고 했다. 나는 2월에 그대로 한국에 눌러앉았고 우리 집에서 졸업 설계를 끝냈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이러한 사태는 결과적으로 보면 나에게는 오히려 잘 된 일이었지만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극심한 정신적 스트레스가 있었다. C는 이로써 내가 독일 유학생이 아닌 독일 사이버대생이 됐다고 말했다. 나는 심사 위원회에 의해 제시됐던 설계 주제를 떠올리며 디지털 노마드라는 보다 그럴듯한 호칭으로 반박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홉 시쯤 잠깐 눈을 떠 시차 적응을 걱정하다가 그대로 다시 잠들어버렸다. 다행히 다시 깼을 때는 동이 트기 직전이었다. 잠들기 전의 좋은 기분이 지속됐다. 어스름 속에서 짐을 정리했는데 짐이라고 해봐야 90개의 마스크와 빈 포트폴리오가 전부였다. 이번에 독일로 돌아오는 상상을 하면서 뒤샹처럼 자신의 작품들을 미니어처로 만들어 상자 속에 모아 넣고 호기롭게 대형 미술관을 찾아가는 빈털터리 예술가를 떠올렸는데 마지막 발표가 끝나고 비행기를 타기 직전까지 2주 내내 놀기만 했기 때문에 정작 내가 들고 온 것은 빈 포트폴리오 두 권뿐이다. 정리를 끝내고 창문을 열자 차고 상쾌한 공기가 들어오면서 처음으로 집 안의 냄새를 느꼈다. 한국의 집과는 또 다른 기분 좋은 냄새다. 이곳의 비누와 빨래 세제 향이 섞인 냄새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갑자기 내 가슴은 약간 비정상적인 행복으로 가득 찼다. 그것이 비정상적인 이유는 돌아오기 전까지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것이고 더구나 난데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믿을 수 있었다. 축축한 풀 냄새가 났다. 개운하고 들뜬 상태로 창가에 서서 익숙한 기찻길과 검은 나무들을 바라봤다. 정신이 점점 명료해졌고 어쨌든 나에게는 가능성과 에너지와 시간이 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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