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시 반쯤 일어나 청소기를 돌리고 창가의 물건들을 상자에 옮겨 담았다. 처음 이 집에 이사 왔을 때 여기저기 붙였던 엽서들도 모두 뗐다. 인내심이 없어 아침에 다시 전화를 건 덕분에 예상치 못했던 방식으로 일이 진행됐다. 독일에서 어떤 일을 처리해야 할 때, 여러 명의 사람들에게 재차 확인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그들은 모두 다른 말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곧 순식간에 만들어진 계약 해지 신청서를 들고 GWG 사무실을 찾았는데 마침 오늘 다른 건물로 이전했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이상한 우연이다. 2018년 2월, 사인한 계약서를 들고 처음 사무실을 찾았을 때도 이전 안내문과 함께 문에 다른 주소가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다시 이 건물로 찾아왔던 것처럼 술래잡기를 하는 기분으로 이번에도 나에게 주어진 새로운 주소로 찾아갔다. 건물은 바뀌었지만 첫 방문 때와 마찬가지로 뜯지 않은 박스들이 똑같이 사방에 쌓여 있고 비스듬히 문이 열린 방들은 텅 비어 있었다. 나는 그 박스들이 모양만 그럴듯한 속임수이거나 사람들에게 집을 임대해 주는 비즈니스와는 전혀 상관없는 온갖 잡동사니로 채워져 있는 상상을 했다. 아직 연결되지 않은 컴퓨터들 사이에서 이 실체가 없는 듯한 회사의 유일한 직원처럼 보이는 땅딸막한 여자가 불쑥 나타났다. 물론 그녀는 2년 전 내 계약서를 받았던 여자와는 다른 얼굴이다. 나는 이 서류에 오늘 날짜의 도장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설명했고 그녀는 곧 도장을 찍은 서류를 복사해 한 부를 나에게 돌려줬다. 다시 밖으로 나왔을 때 시내의 풍경은 걱정했던 것만큼 생경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전철을 탈 때나 실내에서 마스크를 썼고 밖으로 나오면 벗었다. 공원의 나무 밑에는 한량들이 드러누워 졸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와서 작업을 하다가 할머니가 곧 돌아가실 것 같다는 연락을 받았다. 아빠에게 영상 통화로 소식을 듣고 앞으로 한 달간의 나의 계획에 대해 얘기했다. 그 계획을 말할 때, 나는 그중 어느 부분이라도 달라지거나 내가 원했던 방향으로 진행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면서도 그것이 불안하거나 두렵지 않았다. 얼마 후 한국 시간으로 새벽 한 시쯤 엄마는 할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취소되지 않았더라면 이곳으로 돌아오는 비행기가 뜰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