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일기

2020. 8. 15 토

by 홍석범

한국은 광복절이지만 엄마는 비가 너무 많이 와 태극기를 걸지 못했다고 했다. 아침에 두 번째 짐을 한국으로 부쳤다. 도합 37킬로나 보냈는데 아직도 한 번은 더 해야 한다. 읽지도 않을 책들을 굳이 이국 땅까지 짊어지고 온 뒤 다시 비싸게 집으로 돌려보내는 바보 같은 짓을 계속하고 있다.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어 자주 뒤적거리기에 적합한 몇 권은 남겨 놓을 생각이다. 어디로든 새로 이사를 갔을 때 책이 없다면 삭막하고 비인간적으로 느껴질 것이다. 핸드카트에 꽉 찬 박스를 올리고 우체국까지 느리게 끌고 가는 의식을 치를 때면 약간 노인이 된 듯한 기분이 든다. 사물이 육체와 종국에는 정신까지도 지배하는지 모른다. 은밀한 사실은 나는 사실 그런 기분을 즐긴다는 것이다. 그 초탈한 느낌에는 어딘가 자유와 걱정 없음이 가미되어 있다.


항상 마시던 콜라 대신 오렌지주스를 마시는 습관이 생겼다. 몸을 생각해서라기보다는 단지 우연에 의한 것이다. 목이 말랐던 순간에 드물게도 오렌지주스가 마시고 싶었고 그날 콜라 대신 오렌지주스를 산 이후부터는 계속 오렌지주스만 마시고 있다. 단순히 반사적인 어떤 것. 그러나 나는 매번 새로운 오렌지주스를 고르기 때문에 반사적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


어제 막달레나를 다시 만나 무척 반가웠다. 그녀가 역 앞에서 나를 와락 껴안았을 때 우리 주변에는 사람들이 많이 앉아 있었기 때문에 나는 약간 민망했다. 우리는 그녀의 자전거를 끌고 칼스회에로 올라가 맥주를 마시면서 그간 있었던 일들에 대해 얘기했다. 막디는 내가 발표 끝 무렵 마침내 가장 중요한 비밀을 밝힌 직후 죌크 교수의 흥분한 얼굴에 대해 즐겁게 조잘댔다. 나는 교수들의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 어쨌든 그건 성공적인 한 편의 연극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계속해서 내가 언제부터 그렇게 할 것임을 알았는지, 어떤 순서와 방식으로 작업했는지 등을 자세히 알고 싶어 했다. 날씨는 선선했고 우리는 슈투트가르트 시내를 내려다보며 앉아 있었다. 벌들은 계속 우리 입술 위에 앉았다가 다시 날아오르기를 반복했다. 테이블 위에 두 마리의 죽은 벌들이 있었는데 그 주위를 맴도는 다른 녀석들을 보면서 막디는 벌들은 연대감이 아주 강하기 때문에 지금 죽은 동료를 애도하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널브러져 있는 동료의 꽁무니를 빨고 있는 한 놈을 보며 잡아먹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녀는 남자 친구인 알베르토와 새 집으로 이사했는데 그녀의 생일날 만났던 게오르그와 레이아도 함께 산다고 했다. 그리고 내가 이사할 때 도와주겠다고도 했다. 막디는 운전을 할 수 있으므로 우리는 아마도 하루 차를 빌려 내 짐들을 옮기게 될 것이다. 그녀에게 핸드폰으로 내 포트폴리오를 보여줬을 때 그녀는 너무 예뻐서 당장 집으로 가 침대에 드러눕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속으로는 기분이 좋았지만 그런 말은 하면 안 된다고 했다. 이미 막디는 나에게 한 번 읽어봐 달라고 그녀의 WA를 보냈었고 우리는 그것과 그녀가 어떻게 졸업 설계를 하면 좋을지에 대해 얘기했다. 나는 떠오르는 생각들을 두서없이 얘기했고 그녀는 새로 산 수첩에 가끔씩 무엇인가를 메모했다. 그녀가 그곳에 무엇인가를 써달라고 했을 때 나는 안녕! 나는 널 사랑해! 라고 썼다. 독일어가 막힐 때마다 나는 두 눈을 손으로 가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우리는 다시 설계, 암스테르담, 한옥과 같은 것들에 대해 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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