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일기

2020. 8. 18 화

by 홍석범

나흘 만에 회신이 왔는데 작업은 마음에 들지만 현재로서는 자리가 없다는 내용이었다. 아쉬움과 무력감을 느꼈지만 걱정했던 것만큼 감정적이지는 않았다. 나중에라도 자리가 나게 되면 꼭 알려달라는 다소 부질없는 답장을 보내고 잠시 생각을 가다듬을 시간이 필요했다. 차선책을 어렴풋이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모든 정신을 이 한 곳에만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장 어떤 추진력 있는 행동을 하기에 좀 거북스러웠다. 베를린에 대해 의논하기로 했던 후버 교수에게 짧은 메일을 보내고 난 뒤 뭘 더 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도착 이후 아직 두 주가 채 안 됐지만 한 달은 넘은 것 같이 느껴진다. 하루하루 쉼 없이 무엇인가를 했고 (그 사실에 매우 감사하다) 일들이 순차적으로 해결되어 나가던 중 잠시 제동이 걸린 것이다. 마침 마지막 짐을 한국으로 보냈던 차였기 때문에 모형들을 전부 내다 버렸다. 한 번은 양손으로 모형을 들고 그 위에 피자 한 판을 올린 채로 전철을 탔었는데 마주 앉은 아저씨가 굿 아이디어! 라고 했던 기억이 있다. 집에서 촬영을 다시 한 모형들도 있지만 대체적으로는 인력 낭비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똑같은 상황이 온다면 나는 또 그것들을 전부 집으로 가지고 올 것이다. 쓰레기장에서 내가 심혈을 기울여 붙였던 벽과 기둥들을 밟아 부수고 있는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약간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한 무더기의 나무판자들과 종이 쪼가리들을 큰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자고 일어나니 다시 조금 맑은 정신이 되었고 베를린의 사무소들을 알아보며 두 군데에 지원했다. 브루노 피오레티 마르케즈는 모놀리스가 컨셉인 사무소로 전반적인 분위기와 프로젝트들이 마음에 들었고 바코우 라이빙어는 아마 내가 일하기에는 약간 과도하게 힙하고 상업적인 곳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당분간은 이 같은 기계적인 루틴의 연속이라고 생각하니 살짝 멀미가 날 것 같았다. 지금은 그나마 답답함을 이렇게 써 없애버리는 것이 할 수 있는 전부다. 부디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고 항상 상황을 올바르게 판단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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