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뜨자마자 창문에 튀긴 물방울들이 보였다. 핸드폰으로 메일을 확인한 뒤 북흐너 브륀들러에 포트폴리오를 보내고 후버 교수에게 답장을 썼다. 그녀는 고맙게도 9월에 MVRDV가 베를린에 지점을 낸다느니 분트슈는 소개 없이는 지원자를 받지 않는다느니 하는 이런저런 정보들을 보내주고 있다. 나는 MVRDV에 전혀 지원할 생각이 없고, 분트슈뿐만이 아니라 베를린 전체에 내가 커넥션이 없다는 사실은 이미 그녀도 잘 알고 있을 테지만 그녀의 이러한 행동은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주며 그녀에 대한 나의 신뢰를 더욱 견고하게 한다. 밤새 쌓여 있던 설거지를 하고 청소기를 돌렸다. 비는 아쉽게도 금방 그쳐버렸다. 흐린 하늘을 보며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래간만에 공기가 시원해진 김에 창문을 열어놓고 책을 읽기 위해서다. 한국으로 보내지 않은 몇 권의 책들 중 정지돈의 소설을 조금 읽었다. 이 책을 보내지 않은 이유는 내가 (한국의 책들까지도 통틀어서) 가지고 있는 유일한 한국 소설이기도 하지만 S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S는 몇 주 전 내가 개인적으로 초대한 몇몇 사람들 앞에서 내 마지막 학생 프로젝트를 발표했을 때 이 책을 언급했었다. 표지가 다 떨어진 이 책은 작년 초 내가 잠깐 한국에 들어갔을 때 구의동의 한 와인바에서 그녀가 나에게 준 것이다. 그녀는 특유의 꼬불거리는 글씨로 ‘2017년 12월 6일에 영풍문고에 주문해서 7일에 받고 8-11 경주 여행에 가져갔다가 계속 읽고 있음’이라고 써놨다. 곧 이 닳고 닳은 책은 한국 소설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내가 가끔씩 펴보는 유일한 한글 책이 됐다. 소설에 대한 소설처럼 느껴지는 이 책에는 내가 좋아하는 이름들도 종종 등장하는데 그 모든 것을 일종의 인용처럼 환원시키면서 작가는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해 간혹 그럴듯한 말을 한다. 신 교수님이 내 프로젝트에 대해 건축에 대한 건축이라는 분에 차는 말을 해줬을 때 어쩌면 S는 비슷한 연관성을 떠올렸는지 모르겠다. 오늘 내가 그녀가 나에게 준 책 속에서 새롭게, 어쩌면 처음으로 발견한 문장은 소설은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쓰이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다. 설계 제목이 도서관의 픽션인 이유를 설명하면서 그 모든 여정이 내가 오 년 전 군대에서 썼던 유치하고 미완인 한 이야기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말했을 때 막달레나는 나에게 글을 쓰라고 했다. 그녀는 아마도 소설을 의미한 것 같다. 나는 가끔씩 그리고 유일하게 일기를 쓰지만 그것은 나에게 소설과 별반 다르지 않다. 죽은 작가들의 일기 읽는 것을 취미로 하는 나와 같은 별종이 아니라면 사람들은 보통 남의 일기를 읽지 않는다. 일기는 지극히 개인적인 존재 본능의 문제이며 편집증적인 아무개의 인생사라는 측면에서 결국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라 단지 쓰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면 무엇일까? 이 말은 물론 존재하기 위해 쓴다는 다소 절망적이며 과대평가된 말과 동어반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