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일기

2020. 8. 29 토

by 홍석범

두 번째 일기책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정말 아무 쓸모없는 일이지만 하루 두 시간 정도 단순한 정신노동으로 좋다. 예전의 일기들을 차례로 읽고 삭제하거나 덧붙이면서 갈무리하는 것은 다시 일기를 쓰고 싶게 만든다. 나의 글쓰기는 (그것을 글쓰기라고 부를 수 있다면) 종종 이런 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모든 소설이 이미 다른 소설 속에서 시작된다는 측면에서, 또한 (익명의 독자에 의해) 매 순간 확장되고 있다는 측면에서 글쓰기는 원래 이렇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일기를 쓰는 순간에는 어떠한 현실성도 필요하지 않고 연대기적이 되는 것을 지양해야 한다고 믿는 편이지만 유일하게 그것이 책의 형태로 묶이는 과정만큼은 목록 작성의 원칙대로 이루어진다. 이 목록은 사유의 인과관계를 암시하지도 않고 모종의 절차(화요일 일기는 월요일 다음 날에 쓰여지고 수요일 일기는 화요일 다음 날에 쓰여진다는 식의)를 확인시켜주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이 슈도 연대순이 중요한 이유는 단순히 그것이 일기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반대로 사전이 될 수도 있고 소설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럴 경우 나는 더 이상 날짜들로 이루어진 목록이 아닌 다른 목록을 적용해야 한다. 그러한 목록 중 하나는 사유의 인과관계를 암시하게 되고 또 다른 목록은 모종의 절차(누군가 살인을 저지르거나 혹은 무인도에 표류하게 되는)를 확인시켜주게 된다. 이러한 조합론이 아마도 모든 글쓰기에 대해 말할 수 있는 두 번째 특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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