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일기

2020. 8. 30 일

by 홍석범

원피스. 대학교 2학년 여름 우연히 티비에서 더빙된 극장판을 봤다. 아마 오마츠리 남작과 비밀의 섬이었던 것 같다. 동료 간의 믿음을 시험당하는 한 골치 아픈 해적단의 이야기. 그때까지 방영된 TVA 412화를 모조리 다운받아서 정주행한 건 그 얼마 뒤다. 방학 2주간 매일 밥 먹는 시간을 빼고 하루 10시간씩 원피스만 봤다. 무언가에 빠지게 되는 방식이 대개 그렇듯 앞뒤가 없이 열정적으로. 원래 만화책이라는 미디어에는 별 관심이 없었을뿐더러 애니를 먼저 보게 된 바람에 목소리가 없는 주인공들에는 도통 몰입이 되지 않아 만화책은 끝까지 보지 않았다. 물론 원작에 대한 의무감으로 72권까지 사긴 했지만. 그 후로도 P.O.P 피규어까지 한창 모으다가 어느 순간부터, 아마도 지지부진한 이야기의 진행 속도에 지쳐 몇 년간 뜨겁던 관심도 점차 수그러들었다. 언젠가 하드 정리를 하면서 거의 500기가 이상 용량을 잡아먹고 있던 원피스 폴더를 지웠고 이사하면서 피규어들은 전부 침대 밑으로 들어갔다. 3년 전 독일로 오기 전 당시 백수였던 G에게 마지막으로 비닐도 뜯지 않은 만화책 72권을 전부 줘버렸을 때 이제 원피스는 추억이구나 생각했던 것 같다. 그때 G는 버킷 리스트 중 하나를 이뤘다며 좋아했다. 며칠 전 정말 우연하게도 독일 티비에서 방영되는 (도저히 적응이 안 가는) 더빙판을 보기 전까지는 이 모든 사실을 잊고 있었다.


내가 원피스에 빠졌던 이유는 그것이 처음부터 끝까지 동료에 대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만화의 가장 근본적인 판타지는 초인적인 능력을 주는 어떤 열매가 아닌 동료애라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내가 선망한 것은 그것이었고 곧 각각의 사연을 지닌 채 가족이 된 밀짚모자 일당을 좋아하게 됐다. 무엇보다 그들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흐뭇해지는 게 좋았다. 만화를 좋아하는 것과 만화 속 주인공을 좋아하는 것은 전혀 다른 얘기인데 선자는 사건과 재미를 뜻하지만 후자는 어떠한 존재, 즉 인간적인 무언가를 뜻하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내가 멈췄던 지점부터 그동안 다시 약 400화가 쌓였다. 일본에서 처음 방영된 지 20년이 지났고 내가 보기 시작한 이후로는 10년이 지났지만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에 이상하게 마음이 놓인다. 이번에는 2주 만에 몰아서 보지는 않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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