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 전환을 위해 아침에 진델핑엔의 샤우베어크에 갔다. 외출을 했다는 사실만으로 힘이 났고 시내와 멀어지면서 여행객의 기분이 들었다. 표를 끊어준 남자는 내가 첫 손님이라고 했는데 거의 한 시간 동안 다음 손님이 오지 않았다. 가장 처음에 눈에 들어온 작품은 토니 크랙의 Eroded Landscape로 그 고대적인 이미지는 그리스 비극, 불멸자들의 도시, 인셉션 등을 연상시켰는데 나는 곧 그 모든 것이 기하학적인 구성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그 근저에 깔려 있는 문학적인 은유법에 있어서 공통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혼란스럽게 그러나 동시에 정갈하게(이 표현에 대해 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 쌓여 있는 유리병과 유리잔들은 전체적으로 미완의 건축물 같은, 진부하게는 바벨탑과 비슷한 인상을 주기도 하지만 사실 이 작품의 목적은 그 어떤 아키타입도 불러오지 않는 것이며 (어쨌든 나는 그렇게 느꼈다) 아마도 이러한 연상은 나라는 개인의 심미주의와 샌드블라스트 된 유리의 오묘한 효과에 의한 것일 뿐으로 그 전부 조금씩 다른 수많은 우윳빛과 옥빛들은 끝없는 연상 작용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는데 고고학적인 분위기를 풍기면서도 섬세한 각각의 오브제들이 집합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은 일종의 비시간성인 것처럼 느껴졌다. 이 집합성은 말하자면 작품의 가장 감동적인 측면이었는데 그것은 역설적으로 다시 어떤 시간, 이를테면 그 각각의 공예품들이 만들어지고 모래로 처리되고 옮겨지고 모여지고 배치되기까지의 역사를 표명하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고고학적이었다) 어쩌면 그로써 시간이라는 미지의 개념의 조합적 혹은 파편적 성격이 드러나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이 작품이 마음에 들었던 이유는 단지 그것의 아름다움 때문이며 시간에 대한 헛소리는 작품을 기억해내는 과정에서 떠오른 것을 두서없이 적은 것에 불과한데 물론 후버는 아름다움은 무지한 단어이고 우리는 그 배후에 어떤 허무맹랑한 작용과 반작용들이 복합적으로 관계하고 있는지를 분석해내야 한다고 주장하겠지만 내가 이 작품을 보자마자 가장 먼저 했던 생각은 나의 얄팍한 기억 속에 남아 있는 현대 미술-설치품들 중 이것이 가장 시적이며 아름답다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천성적으로 오래되고 닳은 것을 좋아하는 취향이기도 해서 그 질감과 색감이 매력적으로 느껴졌고 비대칭적인 구성과 무질서 안의 어떤 구조적인 느낌이 좋았는데 이 모든 외적 인상을 어쩌면 나는 단순히 시적이라고 표현한 것일지도 모르겠고 다시 생각해보면 시라고 하기에는 각각의 오브제들이 너무나도 옹기종기 붙어 있어 그보다는 사전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그러나 분류법이 없는 사전처럼 단순히 아름다운 단어들이 무작위로 나열된다면, 즉 ‘Eroded’와 ‘Landscape’처럼, 그 또한 시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따위의 생각들을 했다.
그 맞은편 방에는 작가와 작품명이 기억나지 않는 다소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아크릴판이 있었는데 ‘서 있는 아크릴판’과 비슷한 류의 일차원적인 제목이었던 것 같다. 처음 맞닥뜨렸을 때 오렌지색 투명 아크릴판이 교묘하게 구겨져 지지대 없이 서 있는 형상과 그 모서리가 마치 토치로 갓 절단된 철판처럼 거의 흰 형광 오렌지색으로 빛나는 것이 인상적이어서 잠시 그것이 어떤 현상인지 파악하기 위해 유심히 들여다봐야 했는데 재료가 형광 아크릴이라고 명시되어 있긴 했지만 형광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은 모서리뿐이었고 그래서 빛이 마치 그 내부에 납작하게 압축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구글에서 형광 아크릴을 검색한 결과 이승준이라는 사람이 개발한 사실은 인테리어 소품에 더 가까운 아크릴 식기 제품에 대한 정보에서 형광 안료를 미량으로 첨가하면 형광색이 경사면을 통해서만 뚜렷하게 보이게 되므로 절단면에서는 그 효과가 극적으로 발현된다는 요지의 설명을 찾을 수 있었고 나는 그것을 시야 선택 유리와 비슷한 원리라고 이해했다. 어쨌든 이 아크릴판 역시 미적 오브제의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은 분명한데 트론의 세계에서 리처드 세라가 예술을 했다면 이런 것일까 생각하게 만드는 사이버펑크적인 물성과 간결하고 본질적인(게다가 얇은) 형상의 묘한 대비는 어떠한 심오한 제스처도 없이 호기심을 일으키며 그에 대해 작가의 장황한 정신분석적 해설 대신 간단하고 명료한 화학적 내지는 물리적 해답을 제시한다는 측면에서 직관적이고 순전한 매력이 있었다.
두세 팀이 더 들어오면서 램프를 따라 위로 천천히 사라져버릴 수 있는 구조의 사진 전시실로 피신했다. 안드레아스 거스키의 거대한 성당 사진 앞에서 잠시 넋을 놓고 있었고 (배경 전체에 걸쳐 웅장하게 반복되는 스테인드글라스의 모든 창살 디테일에 비상식적으로 또렷하게 초점이 맞춰져 있었는데 이러한 변태적인 조작은 그것을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성당의 이데아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빔 벤더스의 그라운드 제로 파노라마는 사진으로서의 매력보다는 그 옆에 작가가 서술해놓은 내용 때문에 머릿속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테러가 있은 후 12월에 그는 일종의 트라우마를 가지고 뉴욕으로 갔다. 당시 그 잔해를 찍는 것은 모든 작가들에게 타부였고 뉴욕시는 유일하게 조엘 메이어로비치에게 도큐멘테이션을 목적으로 사진 기록을 일임한 상태였다. 빔 벤더스는 그와 친분이 있어 그의 보조로 하루 현장을 방문할 수 있었는데 내내 주변 고층 건물들의 그림자에 가려져 있던 그 거대한 구멍으로 어느 순간 아마도 어딘가의 유리창에 반사된 빛이 구석구석을 화사하게 비추며 내려왔고 그는 그것을 모든 것은 다시 괜찮아질 것이라는 시간의 위로와 약속으로 받아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