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일기

2020. 9. 29 화

by 홍석범

금요일의 대화 이후 계속 찜찜함이 남아 이런저런 것들을 찾아봤고 여기 쓰는 것은 그것을 정리하여 내 의식 중에 확고하게 가지고 있기 위함이다. 어쩌면 나는 막달레나에게 한국의 건축은 없다고 말하는 대신 이렇게 대답했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한국 건축가의 작품을 보여줄 만한 것이 없다는 뜻으로 한국 건축은 없다고 말했다. 막달레나가 실제로 서울에 온다면 경복궁을 제외하고 어떤 건물을 소개해 줄 것인가? 그나마 하나 떠오르는 것은 김수근의 공간사옥뿐이다. 건물과 그 건물을 지은 건축가를 함께 말할 수 있는 경우는 몇이나 될까. 건물과 건축가를 함께 말하는 것은 하나의 담론을 말하는 것이며 이것은 유학 내내 내가 고민했던 문제이자 끝까지 별다른 답을 생각해내지 못한 문제이다. 한국에서 학교를 처음 다니기 시작했을 때부터 조금씩 커진 이 불신감은 유럽에서의 삶이 길어지고 건축학도로서의, 그 이전에 한국인으로서의 나의 자리와 역할 등에 대해 고민하게 되면서 어떻게든 수용해야만 하는 가슴속 구멍 같은 것이 되었는데 나는 지금까지 이것을 해결하지 못했고 이에 대해 외국인 친구에게 설명하는 데 실패했다.


한국의 근현대 건축사는 우선적으로 건축에 대한 담론이 아니라는 측면에서 건축사라기보다는 건물사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많은 전통 건축이 일제강점기와 6.25 등을 지내면서 소실되었고 그 이후에는 잃은 것을 체계적으로 정비할 새도 없이 짧은 시간에 경제가 발전하면서 건축뿐만이 아니라 사회 전반적으로 개발에만 치중했다. 이 모든 게 집약된 것이 아파트인데 실제로 막달레나가 한국에 온다면 가장 처음으로 볼 것이 아파트고 가장 많이 볼 것 또한 아파트다. 건축가의 매니패스토가 보통 주택에서 시작한다는 측면에서 이러한 사태는 이미 한국 건축의 결핍을 함축하고 있으며 한국 사회에서 주택의 문제는 건축적으로 제기된 적이 없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대한민국 주거의 6할이 아파트이고 사람들의 4할이 아파트에서 사는 실상은 국가가 주택을 어떻게 이해하는지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6.25 전쟁으로 황폐해진 나라를 위해 군사 정권이 내세웠던 것은 ‘가족 재건’으로 국가는 선전과 광고를 통해 정상 가족이라는 이미지를 사람들에게 각인시켰는데 70년대까지는 부모와 세 자녀, 그 뒤로는 부모와 두 자녀가 이 이미지에 부합하는 것이었고 1962년 대한주택공사의 마포아파트를 기점으로 시작된 대단위 아파트 건축이 전부 정상 가족에 맞춰 설계되면서 가장 보편적인 주거의 형태가 강제되었다. 그 이후 현재까지 삶의 형식이 꾸준히 변화되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아파트가 바뀌지 않는 이유는 현금으로서의 역할 때문이며 그 가치가 주거의 질이 아닌 어느 동네에 위치하는지를 기준으로 결정되는 경제 논리가 사라지지 않는 이상 건축가가 주택의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없을 것이다.

이런 암울하고 악순환의 상황이 된 배경을 거슬러 올라가면 궁극적으로 자주성의 결핍을 인식하게 되는데 이것이야말로 한국 건축의 근원적인 결핍이 아닌가 생각한다. 19세기 말 최초의 서구 양식은 정치적인 상황에서 타율적으로 유입된 것으로 당시 한국은 그것을 자주적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우리나라의 개항은 일본의 강압에 의한 것이었던 만큼 일본의 외교공관 시설이 처음으로 원산, 인천, 서울, 부산 등지에 일본의 초기 목조 기술로 지어졌고 1890년 이후부터 차례로 서양 각국의 외교공관이 르네상스 양식을 따라, 종교 건축은 고딕 양식을 따라 지어졌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일본은 조선의 행정기구를 재조직하면서 관아 건물을 많이 세웠는데 1916년부터 10년간에 걸쳐 세워진 총독부 건물은 르네상스식 석조 건축으로 일제강점기 중 가장 규모가 큰 것이었다. 1922년 조선에 와 있던 일본인을 중심으로 조선건축회가 조직되었지만 당시 회원 122명 중 우리나라 기술자는 한 사람뿐이었고 이듬해에 가입한 10명 중 대부분은 1919년 첫 한국인 졸업생을 낸 경성공업전문학교 출신이었다. 그러나 이들 중 일부가 작품 활동을 한 것은 1930년대 초부터로 일본이 한국인들에게는 전문 교육의 기회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1929년 한국인 최초로 자신이 설계한 건물(김연수 씨 저택)을 지은 박길룡은 후에 조선주택잡감에서 이른바 조선미를 보존하고 싶다는 기분이 답보의 근원이며 실용상 필연적인 것만을 남겨 놓아야 한다고 썼는데 이처럼 강점기 동안 국내 건축가들의 주체적인 의지와 건축적 사유가 없지는 않았지만 나름의 해석을 통해 유의미한 결과물을 만들어내기에는 사상적으로 더 열악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일제가 아닌 것이 없었고 일본은 이미 자국의 전통이 서양화를 거치면서 나름의 비판적 시각을 발전시키고 있었지만 한국은 이것을 통해, 말하자면 일차적으로 일제화된 서구 문물을 이차적으로밖에는 경험할 수 없었고 이러한 번역의 번역에 근간을 둔 사유는 기약 없는 지연을 거치거나 표면적으로 머무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나는 지금 건축이라는 단어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이 단어부터가 일본을 통해 들어온 용어로 원래 한국에서는 영건營建이나 조영造營이라고 썼다. ‘건축’은 일본이 1880년대에 서양 건축을 도입하면서 ‘아키텍처’를 처음 번역한 것으로 일본에서 공식적으로 사용된 것은 일본의 조가학회가 1897년 건축학회로 개칭되면서부터였으며 이 과정은 단순한 번역이 아닌 나름의 건축론이 확립되어가는 과정이었다. 이러한 사상적 논의는 그 타당성을 차치하고서 이토 츄타가 1894년에 발표한 ‘아키텍처의 본의를 논한 다음 그 번역어를 선정하여 우리 조가학회의 개명을 바람’과 같은 논문에서 이미 확인할 수 있는데 여기에 츄타는 건축의 역사에 근거해서 형식과 그 적용 원칙을 논하는 것은 건축철학에 속하고 실제 적용은 건축술에 속하기 때문에 ‘아키텍처’를 배우는 것은 이치를 논함과 동시에 수법을 구하는 것으로 그 진상을 온전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학과 술을 모두 익혀야 한다고 썼다. 한국에서는 을사조약 후 관직 개편과 함께 탁지부에 건축소가 생기면서부터 건축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지만 그 배후에 어떤 사상적 논의가 있을 리 없었고 자신들의 전통에 입각해 건축이라는 행위가 도대체 무엇인지 그 광범위한 의미 영역을 숙고하고 외국 문화와의 비교를 통해 스스로 정의를 내리고자 하는 체계적이고 학술적인 시도가 있었던 일본에 비해 한국은 아키텍처가 아닌 건축이라는 말로 이미 자주적 철학의 근간을 빼앗긴 것이나 다름없었다.


광복 직후에는 경제 사정과 체제의 미확정 등으로 실질적인 건축 활동은 소규모의 것밖에 없었고 1950년부터 3년간 이어진 전쟁 기간의 기록은 전무한데 국토는 황폐해졌으며 그나마 근대화의 기반이라고 할 수 있던 것마저 완전히 와해된 상태였다. 이 상황에서 한국의 근대 건축은 무엇인가를 논하는 것보다 어쩌면 그것이 존재하기는 하는지를 반문하는 것이 현실적인데 1980년대 초에 이르러 근대건축사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한국 건축의 식민성과 그와 결부된 보존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했고 중앙청 건물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재사용하자는 국무회의 의결이나 화신백화점을 둘러싼 논쟁 등은 모두 ‘건축사를 보존하고 재생하는 운동’의 일환이었지만 아직까지도 나는 과연 그것을 건축사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전쟁 후 서울의 폐허를 상상하며 내가 떠올리는 두 인물은 김중업과 이구이다. 이구에 대해서는 정지돈의 건축이냐 혁명이냐라는 글을 통해 알게 됐는데 그 글은 픽션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해서 글을 통해 그려지는 이구의 모습이 현실적이라기보다는 문학적이지만 모든 죽은 자들에 대한 이미지가 사실 문학이라는 측면에서 그것이 설사 가상 인물의 전기라 해도 달라질 것은 없다. 김중업은 김수근과는 대척점에 있던 인물로 김수근은 남영동 대공분실을 설계했고 김중업은 내내 망명자로 유럽과 미국을 전전할 수밖에 없었는데 원래 시인이 되고 싶었던 그는 현대라는 것은 단지 예부터 이어져오는 시간의 한 과정을 지칭하는 것일 뿐으로 전통화와 불가분에 관계에 있음을 강조했다. 시인이 되고 싶었던 것은 이구도 마찬가지였는데 2차 대전이 끝나자 대한민국의 마지막 황세손이었던 그를 일본과 한국 모두 자국민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했고 그는 긴자의 뒷골목에서 여권을 위조해 미국으로 떠났다. 그와 함께 이오 밍 페이의 사무소에서 일했던 솔 르윗은 웃고 있지 않아도 웃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그의 미소를 보며 일본 불교의 선을 떠올렸고 그 인상은 후에 그의 작업에 영향을 끼쳤다고 말했다고 한다. 내가 느끼기에 이들은 모두 불임이었던 한국의 1세대 건축가들이다. 그들은 고국이 없었고 건축가가 되어 폐허가 된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그들의 작품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거나 다시 폐허가 됐다. 결핍은 결핍을 낳는 것일까.


그다음 세대에서 한국의 건축은 어떻게 되었나를 생각하면 다음과 같은 이름들이 떠오른다. 이들은 내가 지금까지 누군가를 통해 들었거나 어떠한 계기에 의해서 찾아보았거나 알게 된 인물들이다. 이 목록에 기준이 있다면 그건 단순히 이들이 내 머릿속에 어떤 어렴풋한 이미지로 들어 있다는 사실이다.


김중업 (1922-1988)

김수근 (1931-1986)

정기용 (1945-2011), 민현식 (1946-)

김준성 (1956-), 조병수 (1957-)

서현 (1963-), 조민석(1966-)


언급할 만한 이름이 더 있을지도 모르겠다. 흙을 좋아했던 정기용은 아웃사이더였고 공간에서 김수근과 일했던 민현식은 한국 건축에 대해 책을 썼다. 브라질로 이민을 떠났던 김준성은 알바로 시자에게서, 엉뚱하게도 마크 트웨인 때문에 미국 서부로 간 조병수는 라파엘 모네오에게서 배웠다. 서현과 조민석은 모두 컬럼비아 출신으로 기성세대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조민석에 비해 서현은 건축가라기보다는 대중 작가에 가까우며 최근에는 유현준이 그 역할을 하고 있는 듯한데 건축을 대중적으로라도 담론화한다는 측면에서 의미 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광복 후에 태어난 이들 전부 1세대 불임의 부모가 입양한 다국적 자식들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아마도 계속해서 중심이 되는 사조가 부재해왔기 때문인지 모른다. 말하자면 한국인 건축가들이 계승해온 건축론의 철저한 부재. 우리들이 건축을 어떻게 이해하고 무엇을 목표하는지를 나타내 주는 우리만의 믿음의 부재. 내가 이들의 작품을 한국적이라고 느끼지 못할 때, 그리고 바로 그 이유에서 막달레나에게 무어라고 설명하며 보여주기를 꺼리게 될 때 나는 그것의 스타일이 아닌 근간의 무엇인가를 문제 삼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도대체 내가 한국적이라고 부르는 것이 무엇일까 숙고해보면 단순히 김중업이 프랑스 대사관의 지붕에 사용한 아름다운 처마선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만은 분명하며 그것을 나 또한 경험해본 적이 없어 한국인을 통해 표현된 무언가를 뜻한다고 밖에는 쓸 수 없는데 과연 그런 것이 이제 와서 가능하기는 한지, 혹은 근본적으로 필요한지조차 의심스럽고 어쩌면 이 모든 건 역사의 결핍, 기술의 결핍, 철학의 결핍에 대해 생각하며 나 스스로 만들어낸 미신과 열등감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왜 다양한 일본 건축가들의 작품에서는 그 다양성 속에서도 일본 특유의 정서가 느껴지는 반면 우리에게는 한옥의 우스꽝스러운 패러디 외에 그런 영속성이라고 할 만한 것을 표현할 방도가 없는 것일까, 바로 이 영속성이라는 것이야말로 김중업이 현대라는 개념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예부터 이어져오는 시간일 텐데 우리에게서는 그 지속이 끊겼다는 것, 다시 말해 50년의 시간이 사라졌다는 사실이 모든 결핍과 문제의 근간이 아닐까, 그것은 곧 한국이라는 존재 안에 도사리고 있는 허공이며 폐허인데 그러한 장소에 유일하게 가능한 건축은 전수된 것이 아닌 새로운 것, 갑자기 도래한 것, 하늘에서 유성처럼 떨어진 것뿐이며 결국 한국 건축은 ‘한국’의 건축이 아니라 단순히 한국에 건물을 짓고 있는 수많은 배경의 사람들, 유럽과 미국 등 온갖 것의 잡동사니에 불과하고 한국과는 아무런 연관도 없는 게 아닐까, 그러나 그런 모방적이고 피상적인 건물들은 한국인이 아니더라도 일본인도 지을 수 있고 중국인도 지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럼 더더욱 한국 건축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애초에 시도된 적도 없다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왜 아무도 이런 사실을 문제 삼지 않는 것일까.



김중업의 말을 되새겨보면서 나는 조병수가 지은 집들을 떠올린다. 한국 건축의 지성적인 결핍은 감성적으로 보상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건축은 결국 지어지는 것이고 그뿐이기 때문이다. 조병수가 추구하는 건축은 굳이 비교하자면 막사발과 닮았는데 고려청자나 백자와 같은 기교나 공예적 완성도보다는 실용적인 미를 추구한다. 무심하게 만들어진 사발의 기품을 알아보고 그것을 다시 발현시킬 수 있는 것은 한국인의 정서이며 이런 시도들은 영속성에 소급될 것이다.



나는 바젤의 한 카페에서 이 대부분을 썼다. 이곳은 예전 은행의 큰 홀을 개조한 곳으로 힙스터들이 모이는 곳이다. 여기서 볼일이 끝나면 밤 기차로 슈투트가르트로 돌아간다. 서울, 뉴욕과 로테르담을 옮겨 다닌 조민석은 점차 홈과 어웨이라는 이분법적 사고가 모호해지면서 다수 중 하나라는 태도가 생겼다고 했지만 나는 비슷한 상황에서 오히려 홈을 더 생각하게 됐다. 한국 건축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한국인 건축가로서 나는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따위의 고민들은 애국심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다. 내가 한국인임은 단순한 사실이며 지금까지는 별로 그것을 숙고하지 않았다. 그러나 점점 커진 구멍은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것이 됐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것을 들여다보고 수용하는 것뿐이다. 그것을 지금에서야 시도하게 된 이유는 나는 이제 막 독일에서 공부를 마친 뒤 건축가로서 처음 일을 시작할 준비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중업과 이구 역시 외국을 전전하며 나와 비슷한 구멍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고 그들의 유령은 고국 없는 부유 속에서 서로 마주치거나 지나쳤을 것이라고 상상한다. 그럼에도 김중업은 계승이라는 표현을 썼다.


내가 이런 것들을 훨씬 덜 명확한 어휘로 많은 설명들을 생략해가며 두서없이 말했을 때 막달레나는 사라진 시간 또한 시간이며 한국인으로서 이미 그 폐허를 하나의 한국적인 역사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취지의 말을 했는데 그건 사실 내가 듣고 싶은 말이었다. 사라지고 없는 것에 없음으로서의 가치를 부여하고 수용하는 것. 그러나 무엇이 사라졌고 무엇이 없는지를 먼저 냉철하게 분석하고 그에 대한 나만의 의식을 형성한 뒤에만 나는 그것을 내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다. 그리고 나는 필연적으로 그것에 대응하게 되는데, 이 대응이 한국인 건축가로서의 나의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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