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일기

2020. 9. 30 수

by 홍석범

우편으로 배송된 졸업장의 봉투 겉면에는 절대 구기지 마시오라고 쓰여 있었다. 유럽의 많은 미술관들을 공짜로 드나들게 해 준 학생증은 오늘 일자로 유효기간이 끝났고 더불어 약 한 달 반 간의 구직 활동도 끝났는데 나는 지원했던 다섯 곳의 사무소 중 세 군데와 인터뷰를 했고 결국 맨 처음 인터뷰를 했던 크리스토프 헤세로 가게 되었다. 집을 구하는 일이 남았지만 헤세에게 도움을 받고 있고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11월부터는 새로운 생활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한 달은 마지막 자유 시간으로 충동적으로 베를린에 다녀오기로 결정했는데 그중 하루는 후버와 만나 도서관 책과 홍삼 차를 주려 한다.


저녁에는 막달레나의 집에서 알베르토, 레이아, 게오르그와 플람쿠헨을 만들었다. 막디에 의하면 지금이 딱 플람쿠헨과 페더바이서를 함께 먹는 시즌으로 우리는 그녀의 지시에 따라 얇게 편 밀가루 반죽 위에 흰 치즈를 바른 뒤 호박, 양파, 파, 배, 건토마토, 쉰켄과 같은 온갖 것들을 올려 굽고 와인이라기보다는 엄청 달고 탄산이 든 갓 짜낸 포도주스에 가까운 페더바이서를 마셨다. 나는 평소보다 두 배 가까이 먹었고 우리는 돌아가며 소매치기당한 이야기를 했는데 알베르토는 구글맵에서 코바흐를 검색한 뒤 어떤 대머리의 노인이 경관 사진을 올려놓은 것을 보여주며 앞으로 내 이웃들은 전부 이런 사람들이라고 말했고 나는 네 명에게 레이아의 핸드폰으로 크러쉬의 오하이오를 들려줬다. 알베르토는 나보고 떨리냐고 물었는데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고 그는 너는 네가 무엇을 원하는지 아니까 괜찮아,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야라고 말했는데 나는 문득 이들 눈에 기술을 배우며 은둔자로 산답시고 독일인 아무도 어딘지를 모르는 독일의 시골 마을로 가는 이 사우스코리안이 약간 미친놈처럼 보이지는 않을까 생각했지만 막디는 자기 또한 베를린의 힙스터 사무소보다는 코바흐의 고즈넉한 말 농장을 택하겠다고 말했고 그러면서도 자신의 새집은 간지나는 베를린 스타일로 꾸며놓았는데 생각해보면 그녀는 실제로 여섯 살 때부터 거의 십오 년 넘게 말을 탄 데다 말타기 대회에 나가서 우승한 전적도 있어서 건축가가 되기 전 그녀의 두 번째 혹은 다섯 번째 꿈이 경찰이었고 이는 한국과는 달리 독일에서는 경찰들이 말을 타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떠올리면서 나도 코바흐에서 말을 타다 보면 어느 순간 베를린 스튜디오에서 살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매거진의 이전글2020. 9. 29 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