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일기

2020. 10. 4 일

by 홍석범

10월 30일부터 살게 될 집에서 이걸 쓰고 있다. 이 집을 계약하게 된 건 정말 운이 좋았다고 밖에는 할 수 없는데 그건 슈투트가르트의 첫 집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내 운이 이것으로 완전히 소진된 것이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이 집은 지붕층으로 여름을 어느 정도 각오해야 하겠지만 학생 도시가 아닌 코바흐에서는 아주 드물게도 가구가 완비되어 있고 널찍한 투룸인데다 천창이 달린 화장실에는 욕조와 샤워부스에 세탁기까지 있으며 발코니 바로 맞은편이 숲이다. 천정 경사면과 오래된 원목 가구는 전체적으로 산장 같은 촌스럽지만 아늑한 분위기인데 실제로 정원을 가로지르면 바로 숲의 산책로로 이어져 매일 조깅을 하기에 안성맞춤이고 사무소와는 걸어서 이십 분 정도 거리로 구시가지와도 적당히 거리가 떨어져 있어 심적으로 일과 휴식을 구분하기 좋다. 주변은 비슷한 박공지붕집들뿐인 고요한 주택가이고 이 집은 그중에서도 숲 가장자리를 따라 위치한 집들 중 하나인데 숲을 내다보는 방향이 남쪽으로 처마가 깊어 직사광선이 큰 문제가 될 것 같지는 않다. 크기는 지금 사는 집의 세 배지만 월세는 조금 더 싸고 수압을 제외하면 아무튼 이보다 더 좋은 조건의 집을 구하기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첫 통화에서 아마도 집주인인 헤어 빌리히와 나는 둘 다 특별한 교감을 느꼈던 것 같고 물건을 살 때 거의 고민을 안 하는 나로서는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린 상태나 마찬가지였는데 나중에 얘기를 들어보니 그 역시도 지금까지 항상 첫 통화만으로 세입자가 될 것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었다고 했다. 다짜고짜 전화를 걸어 자기소개를 한 나는 충동적으로 헤세가 나에게 붙여준 아무래도 믿음이 안 가는 하프너에게 맡기는 것보단 내가 직접 이 집을 그것도 당장 보러 가야겠다고 정했는데 그건 사실 슈투트가르트에서 코바흐까지 여섯 시간 기차를 타야 하는 문제로 말처럼 간단한 일만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결국 기차표를 예매했고 운전수가 없다는 황당무계한 이유로 기센에서 기차가 출발하지 않아 그다음 환승을 줄줄이 놓치는 바람에 여섯 시간이 아닌 장장 일곱 시간에 걸쳐 내가 이곳까지 달려오는 동안 프라우 빌리히는 친절하게도 깨끗한 수건과 침구를 마련해주었다. 헤어 빌리히는 거의 육십 년 전에 슈투트가르트에서 자기 역시 마이스터슐레를 나왔다고 했는데 비슷한 분과의 청년들에게 정이 가는 것인지 나 이전의 세입자도 디자인 계열의 마스터 학생이었으며 이 집에서 졸업 작품도 하고 일도 하다 이주 전에 방을 뺐다고 했다. 내가 전화로 집이 너무 마음에 들어 당장 보러 가고 싶지만 지금 출발하면 이따 집으로 돌아올 수가 없습니다라고 넌지시 말했을 때 그는 자기는 연금이나 받는 노인네로 어차피 할 것도 없이 하루 종일 집에만 있으니 올 수 있으면 와서 자고 가라고 했고 결국 그렇게 만 하루 만에 나는 이곳으로 달려와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한 달 뒤 살 집에서 미리 하룻밤을 묵게 된 것이다.


압권은 내가 처음 집에 도착했을 때로 나는 마스크 때문에 얼굴이 기름 범벅이고 눈은 퀭한 상태였는데 악수를 나눈 뒤 키가 크고 동글동글한 얼굴에 선한 인상의 헤어 빌리히는 마침 자기 자식들이 와 있는데 일단 커피나 한잔하지 않겠냐고 했고 아무 생각 없이 그를 졸졸 따라 들어간 나는 그대로 거대한 십인용 식탁에 아마도 나의 자리인 듯한 빈자리 하나를 남겨두고 빽빽하게 둘러앉아 있는 그의 대가족(내 나이 또래의 두 손녀까지 포함된) 앞에 약간 바보처럼 서 있게 되었다. 그들은 모두 나를 보며 웃고 있었는데 그들의 일요 가족 모임에 갑자기 들이닥친 이 미래-세입자가 문제인지 그를 초대한 미래-집주인이 문제인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었고 계속 이게 내가 있을 자리인가 반문하면서도 나는 반강제적으로 프라우 빌리히 오른쪽의 빈 의자에 앉혀졌는데 다시 생각해보면 딸 혹은 둘째 아들의 와이프 혼자 뒤쪽의 소파에 앉아 앞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흥미롭게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던 걸로 보아 이 함정은 계획된 것이고 그들 모두 가담해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순간 아직 꼬마였을 당시 추석에 안암동 집에 도착해 남자 어른들이 모여 화투를 치고 있는 방에 들어가 주뼛거리며 인사하던 기억이 떠올랐고 나는 의자에 앉으면서 독일에선 세입자와 이런 식으로 압박 면적을 하는군요라고 말했는데 그들은 모두 웃었지만 농담으로 한 말이 아니었다. 다행히도 내 독일어가 소라게처럼 쏙 들어가 버리지는 않았고 프라우 빌리히가 커피를 따라주고 첫째 아들이 그릇에 사과파이를 옮겨줄 동안 나는 나는 누구이며 도대체 이곳에 왜 온 것인지를 다소 장황하게 설명했다. 그들은 모두 열심히 들었고 중간중간 질문을 하기도 했는데 독일로 온 이유와 같은 것들은 이미 나에게는 루틴과 같아서 막판에는 약장수처럼 술술 얘기할 수 있었다. 내가 조심스럽게 여러분들 모두 코바흐에 사시나요라고 물었을 때 연극학을 전공하고 있는 손녀 마들렌을 제외하고는 전부 그렇다고 했고 심지어 딸 혹은 첫째 아들의 와이프는 우리는 헤세의 사무소 바로 근처에 산다고 했다. 딸 혹은 둘째 아들의 와이프가 나에게 물도 마시라며 생수 한 통을 가져다주었는데 그게 사인이었는지 헤어 빌리히는 드디어 위로 올라가 보자고 했고 나는 도착 후 세 시간 같았던 삼십 분 만에 집 구경을 했다.


지금 이걸 쓰면서 이 모든 게 오늘 일어난 일이라는 것, 그리고 그보다 단지 이틀 전까지만 해도 이 집과 이 사람들이 나와는 아무 관계도 없었다는 사실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아까 헤어 빌리히는 이곳은 학생들이 없어서 가구 없이 몸만 들어오려는 사람을 찾기가 힘들다고 말했는데 그때 나는 저는 가구 없는 집들 밖에 없어서 걱정이었는데요라고 말하면서 이건 미트 큐트라고 생각했다. 미트 큐트는 영화의 한 장면 구성으로 이를테면 잠옷 가게에 들어온 두 남녀가 직원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경우다. 남자가 말한다. 저는 상의만 필요합니다. 그러자 여자가 말한다. 저는 하의가 필요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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