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I
방수 스프레이를 뿌린 러닝화를 신고 온 것은 잘못된 결정이었고 온종일 비를 맞으며 여기저기 쏘다닌 데 비해 대단히 멋진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애초에 그런 것을 기대하기에는 이미 베를린에 너무 자주 왔는지 모른다. 약간 한기가 들고 지친 상태로 짧게 밖에 쓸 수 없다.
오늘 예정이었던 철거 명령은 취소된 모양이었고 소녀상 주변에는 작은 팻말들과 구청장에게 보내는 편지, 꽃들이 쌓여 있었다. 실물을 본 것은 처음인데 타지에서 보게 되니 기분이 묘했다. 슈프뤼트 마거스에서 작품은 보지 않고 부산스럽게 서로의 사진만 찍어주던 두 여자가 갑자기 내 옆에 와 앉더니 귀여워서 찍었다며 내가 거스키의 사진 앞에 구부정하게 서 있는 사진을 보여줬다. 그 말이 반어법일까 생각하면서 나는 내가 정말 작군요라고 말했는데 그녀는 사진이 크니까라고 대답하고는 웃었다. 거스키 사진의 특징은 크기가 주는 압도감과 수평과 수직에 대한 병적인 강박증인데 그 끝판왕을 볼 수 있었던 바우하우스 물류창고 사진 앞에서 나는 그것이 사진도 그림도 아닌 것 같다고 느꼈고 하이퍼현실을 통과해 초현실 또는 비현실로 나아가는 과정에는 언제나 그런 오토고날의 마술이 작용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면서 똑같은 방식으로 영원히 뒤로 혹은 앞으로 뻗어나가는 스콜라리의 그림들을 떠올렸다. 후버가 느낌표를 세 개나 붙여 추천했던 BQ의 슈리글리 아카이브에는 생각보다 물건이 많지는 않았는데 그중 몇 종류만 살 수 있었고 나는 패키징에 쓰여 있는 이 쓰레기를 사고 싶은 게 확실해? 같은 문구를 읽고 킥킥대며 시간을 보냈다. 우산이 뒤집어질 정도로 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한동안 정처 없이 걸어 다니다가 새미스로 갔다. 그 슈프리츠쿠헨을 먹기 위해 베를린에 왔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나는 몇 달 전부터 그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고 슈투트가르트에서는 비슷한 것을 찾는 데 실패했다. 로칼에는 예약 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늦게 도착했지만 다행히 자리가 남아 있었고 음식보다는 그 나른한 분위기와 벽화, 옆자리에서 영어로 대화하던 다소 허세스러운 부부가 기억에 남는데 남자는 별다른 반응이 없는 웨이터에게 계속해서 수프에 넣은 브로콜리가 아주 센스 있었어요 따위의 멍청한 말들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