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일기

2020. 10. 14 수

by 홍석범

베를린 I


방수 스프레이를 뿌린 러닝화를 신고 온 것은 잘못된 결정이었고 온종일 비를 맞으며 여기저기 쏘다닌 데 비해 대단히 멋진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애초에 그런 것을 기대하기에는 이미 베를린에 너무 자주 왔는지 모른다. 약간 한기가 들고 지친 상태로 짧게 밖에 쓸 수 없다.


오늘 예정이었던 철거 명령은 취소된 모양이었고 소녀상 주변에는 작은 팻말들과 구청장에게 보내는 편지, 꽃들이 쌓여 있었다. 실물을 본 것은 처음인데 타지에서 보게 되니 기분이 묘했다. 슈프뤼트 마거스에서 작품은 보지 않고 부산스럽게 서로의 사진만 찍어주던 두 여자가 갑자기 내 옆에 와 앉더니 귀여워서 찍었다며 내가 거스키의 사진 앞에 구부정하게 서 있는 사진을 보여줬다. 그 말이 반어법일까 생각하면서 나는 내가 정말 작군요라고 말했는데 그녀는 사진이 크니까라고 대답하고는 웃었다. 거스키 사진의 특징은 크기가 주는 압도감과 수평과 수직에 대한 병적인 강박증인데 그 끝판왕을 볼 수 있었던 바우하우스 물류창고 사진 앞에서 나는 그것이 사진도 그림도 아닌 것 같다고 느꼈고 하이퍼현실을 통과해 초현실 또는 비현실로 나아가는 과정에는 언제나 그런 오토고날의 마술이 작용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면서 똑같은 방식으로 영원히 뒤로 혹은 앞으로 뻗어나가는 스콜라리의 그림들을 떠올렸다. 후버가 느낌표를 세 개나 붙여 추천했던 BQ의 슈리글리 아카이브에는 생각보다 물건이 많지는 않았는데 그중 몇 종류만 살 수 있었고 나는 패키징에 쓰여 있는 이 쓰레기를 사고 싶은 게 확실해? 같은 문구를 읽고 킥킥대며 시간을 보냈다. 우산이 뒤집어질 정도로 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한동안 정처 없이 걸어 다니다가 새미스로 갔다. 그 슈프리츠쿠헨을 먹기 위해 베를린에 왔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나는 몇 달 전부터 그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고 슈투트가르트에서는 비슷한 것을 찾는 데 실패했다. 로칼에는 예약 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늦게 도착했지만 다행히 자리가 남아 있었고 음식보다는 그 나른한 분위기와 벽화, 옆자리에서 영어로 대화하던 다소 허세스러운 부부가 기억에 남는데 남자는 별다른 반응이 없는 웨이터에게 계속해서 수프에 넣은 브로콜리가 아주 센스 있었어요 따위의 멍청한 말들을 했다.

매거진의 이전글2020. 10. 10 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