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II
아침 일찍 후버에게 다시 확진자 수가 치솟고 있으니 점심은 취소하고 HKW에서 바로 만나는 게 좋겠다고 연락이 왔고 나는 아비 바부르크의 아틀라스에 들어 있는 몇몇 그림들의 원본을 보기 위해 게멜데갤러리에 들렀다. 그것을 먼저 본 것은 결과적으로 유익한 일이었는데 님프에 대한 예시들이나 토비아스와 라파엘, 가장 재미있는 패널 중 하나인 호젠캄프 혹은 ‘바지 싸움’ 등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이번 전시를 계기로 핫제 칸츠에서 출판한 모든 패널이 고화질로 재촬영되어 실린 폴리오판의 실물을 볼 수 있었는데 빌더아틀라스는 도서관에도 개념적으로 영향을 준 작업으로 졸업 기념으로 한 권을 사는 건 어떨까 잠시 고민했지만 그 거대한 책을 사서 놓을 곳도 없을뿐더러 당장 그것을 도서관에 대한 하나의 레퍼런스로서만 가지고 있는 것은 사치라고 생각되어 그만뒀다.
안소니 카로의 최후의 심판이 강렬한 인상을 남긴 이유는 그것이 표상적이지만도 추상적이지만도 않고 그 경계에 있었기 때문이며 그 형태들 역시 기하학적이지만도 유기체적이지만도 않았기 때문인데 조각가가 그러한 경지에 다다랐다는 사실이 놀라웠고 시적이라고 밖에는 할 수 없을 그런 묵직한 효과를 과연 인간이 의도할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인간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그런 감동은 시간을 통해서만 가능해지는 것인지 생각했다. 물성에는 분명 시간이 포함되어 있고 그것을 다루는 것은 인간이라는 사실, 즉 모든 동물 중 인간만이 장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이런 면에서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카로는 건축을 일종의 추상적 구문으로 받아들였고 그가 사용한 강철빔, 금속관, 철망 등은 실제로 현대건축의 부품들과 동일한 것인데 그는 여느 건축가 못지않게 구축의 논리 혹은 그것을 통해 얻어지는 내적 합일을 중요시하며 건축은 안에서 나오는 것이고 조각은 바깥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은 말을 했다. 이는 아마도 헤이덕이 우리는 건축(물)의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한 것과 같은 의미일 텐데 언뜻 당연하면서도 생각해볼수록 신비로운 이러한 사실을 감안하면 최후의 심판은 또한 건축의 안도 아니고 조각의 바깥도 아닌 묘한 경계처럼 느껴진다.
크라나흐의 젊음의 샘 앞에 앉아 있는데 내 옆에서 그림을 보고 있던 소년이 아빠에게 왼쪽 배경의 바위산 중 하나가 늙은 여자의 몸처럼 보인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신기하게도 나는 바로 그 직전에 그 사실을 인지한 참이었다.
HKW에서 후버와 그녀의 남편 디터를 만난 것은 오후 세시 반이었다. 패널들은 타원형의 플랜을 따라 걸려 있었는데 바부르크는 원에서 타원으로의 인식적 전환, 즉 완전성을 상징하는 신화적 기하학이 행성의 현실 궤도를 시사하는 과학적 기하학으로 대체된 것을 문화사의 중대한 사건으로 보았다. 그가 79개의 거대한 패널에 매핑해놓은 다양한 시대와 문화권들의 비슷한 이미지들은 그 자신들의 ‘무의식적인 생명’(이것은 멋진 표현이다)을 추적해서 드러내는데, 이를테면 로마의 후기 석관에 새겨진 요정과 강신의 무리는 라파엘과 17세기 네덜란드 풍경화를 거쳐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 식사로 계승되었다는 식으로 이러한 무모하면서도 대단히 흥미로운 계보학의 시도는 보르헤스가 모든 은유는 12개의 유형으로 소급될지 모른다고 말했던 것을 떠오르게 했다. 재구축으로서의 건축을 표방하면서 내가 도서관의 야심찬 계획을 처음 후버에게 털어놓았을 때 그녀는 바부르크의 빌더아틀라스를 찾아볼 것을 조언했는데 므네모시네라는 제목은 이미 내 주제와 비슷한 방향성을 암시하고 있었고 그 결과물보다도 흥미진진한 것은 그러한 세계-분석의 시도가 이루어지는 방식, 즉 한 개인—혹은 거인—의 내부에서 모든 계보학과 분류학과 신화학이 혼합되는 방식이었다. 내가 도서관에서 시도한 것은 건축에서의 그러한 자기-분석, 말하자면 끊임없이 재구축되는 건축에 대한 일종의 매니페스토였고 므네모시네는 바부르크의 도서관이자 또한 보르헤스의 문자의 조합으로만 이루어진 도서관과는 반대로 그림으로만 이루어진 도서관이라는 점에서 내 도서관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전시를 본 뒤 우리는 HKW의 로비에 앉아 한 시간 정도 얘기를 나눴다. 도서관 책과 홍삼 차를 주자 후버와 디터 모두 기뻐했고 특히 책의 인쇄 품질을 크게 칭찬했다. 후버는 심사위원들과 평가 회의를 했던 뒷이야기를 하면서 내가 프로젝트 발표를 하기 직전에 아마 나보다도 자신이 더 떨었을 것이라는 말을 했다.
필하모니에서 내 옆자리(정확하게는 두 자리 건너 옆자리)에 앉은 여자는 내게 혹시 악기를 다루는지 묻고는 자신은 오래전에 합창단으로 저 무대에도 섰었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는데 그것이 계기가 되어 나는 그녀의 커리어에 대한 소소한 이야기들을 듣게 되었다. 그녀는 요즘 합창 수업과 연습을 전부 줌으로 하는데 순서대로 번갈아가며 마이크에 대고 노래를 해야 하며 여름에는 야외에서 함께 연습을 할 수 있지만 모든 사람들이 유일하게 솔로로만 노래를 부를 수 있다고 했다. 나는 합창의 의미가 사라져 버렸네요라고 말했는데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하지만 합창단원은 각자가 솔리스트이기도 하니까요라고 대답했다. 그녀는 또한 쇼팽이 10개나 되는 가곡을 쓴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든지 카라얀은 말년에 성격이 아주 고약했는데 등이 아팠기 때문이라는 등의 말을 했다. 그녀는 그와 복도에서 마주쳤을 때 자기도 모르게 말을 걸었던 적이 있다면서 그때 왜 항상 화가 나 있는지를 물었는데 카라얀은 자신이 10년 일찍 태어났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녀는 그때까지만 해도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지길 원했어요. 말하자면 방송에 출연하고 싶었던 거죠. 나는 잠시 생각한 뒤 대답했다. 물론 그는 아주 잘 생겼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