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석범 Dec 28. 2020

2020. 12. 25 금

기온이 다시 조금 내려갔고 해가 났다. 차고 앞에서 지도를 보고 있을 때 헤어 빌리히가 나와 장갑을 빌릴 수 있었다. 자전거로 L3076 국도를 따라 아이젠베르크 성까지 가볼 계획이었지만 사분의 삼 지점에서 포기하고 돌아왔다. 들판에는 차도 사람도 없었다. 한국에서 귀마개를 가지고 오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말 농장을 지나치면서 내년에는 꼭 승마를 배울 것이라고 다짐했다.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는 검은 말은 상상 속에서보다 크기가 더 커 보였다.


사방으로 찬바람을 맞은 탓에 집에 돌아오자마자 졸음이 몰려왔다. 그대로 소파에 누워 잠들었는데 얼마 후 말소리에 잠이 깼다. 헤어 빌리히의 아들 가족이 놀러 온 모양이었다. 그들은 마당에 나와 맥주나 와인을 마시며 얘기를 나누고 있는 듯했는데 혹여나 그들이 발코니 난간 사이로 흘끗 올려다본다고 해도 소파에 파묻혀있는 내 모습은 보이지 않을 것이고 그 사실이 이상한 만족감과 아늑함을 줬다. 웃음소리와 웅얼거림을 들으며 다시 잠이 들었는데 두 번째로 깼을 때까지도 햇볕은 티비 옆 장을 비추고 있었다.


차를 끓이고 하이데거의 강연록 중 사유에 대한 부분을 읽었다. 들판에 나갔다 온 뒤에는 하이데거를 읽음으로써 펼쳐진 정신을 보자기처럼 다시 묶을 수 있다. 기억과 므네모시네에 대해 뭔가를 써야겠다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이것은 아틀라스의 서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혹은 열 번째 주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주제는 결국 아틀라스와 연결 지어질 것이다.


독일어로 더빙된 나 홀로 집에를 보면서 송아지 고기와 구운 야채를 먹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2020. 12. 24 목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