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석범 Jan 25. 2021

2021. 1. 24 일

첫째로 일기 쓰는 방식을 잊어버렸다고 느꼈기 때문이고 둘째로 얼마 전 프라하에서 찍은 사진들을 꺼내봤기 때문에 카프카를 읽었다. 감시인들이 매를 맞는 장면에서 버클리를 떠올렸고 이것은 다시 보르헤스가 카프카와 그의 선구자들에 대해 쓴 글을 생각나게 했다. 사실 읽고 싶은 것은 일기였는데 그 무거운 책은 한국으로 이미 돌려보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사를 하면서 많은 책들을 한국으로 보낸 것은 멍청한 짓이었다. 그때는 책을 읽을 시간이 없었고 지금은 도리어 훨씬 많아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걸 쓰면서 나는 그때 빌렸던 차가 온갖 짐들로 가득 찼었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가루처럼 어젯밤부터 흩날리듯 꾸준히 내린 눈이 특별한 풍경을 만들었는데  특별함은 전체적인 분위기보다는  입자 개개의 물리적 특성에 기인하는 듯하게 느껴졌다. 아침에 일어나 씻기  모자를 쓰고  시간 정도 산책을 하면서 계속 폴라로이드 사진과 비디오를 찍었다. 나무에 쌓인 눈가루가  번씩 바람에 의해 거대한 베일처럼 쏟아질   밑에 서서 그다음 베일이 또다시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그건 아주 인상적인 경험이었지만  현상을 사진으로도 비디오로도 기록할  없었다.  느낌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자연의 불가해한 리듬 혹은 주기와 같은 것이 묘사되어야 한다. 나무들은 느리고 유연한 방식으로 마치 서로 신호를 주고받듯이 번갈아가며 눈가루를 털어냈다. 그때 순간적으로  주변이 뿌예지면 그건 마치 거대한 날숨처럼 느껴지는데 나는 자연스럽게 나우시카의  장면을 떠올렸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


H와 통화하기 전 청소를 끝내고 벌써 많이 닳아진 갈색 워커에 광을 냈다. 비행단에서 내가 지금 이곳에서 산 정도의 시간이 지났던 시점에 군화를 정비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의식이었다. 늦은 오후에 연병장 경계석에 걸터앉아 군화에 천천히 광을 내면 모든 문제가 중요하지 않은 것이 되고 마음이 개운해지는 효과가 있었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과연 내가 적응을 잘하고 있는 것인지 의구심이 들 때가 있다. 순간적으로 어디서 희망과 위안을 찾아야 할지 모르겠는 상황이 닥치곤 하기 때문이다. 방금 쓴 두 단어는 다소 유치하고 일차원적인 것처럼 느껴지지만 나에게는 앞으로 나아가는 데 대단히 본질적이고 필수적인 것이다. 요즘에는 특히나 그런 신경쇠약 증상이 발생하는 빈도가 높아졌고 다시 회복하기 위해서는 정신적으로 큰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끊임없이 나 자신을 설득하고 위로해야 하는데 이것이 나를 지치게 한다. 내가 일시적으로 불안정해졌다는 증거일 수도 있고 나 자신을 기만하고 있다는 증거일 수도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2021. 1. 23 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