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석범 May 24. 2021

2021. 5. 23 일

베를린! 베를린!이라는 책을 쓴 투콜스키 거리의 카페에 앉아 있다. 방금 바로 이 자리에서 이 건물들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그 사진 속의 나는 지금의 나보다 3년 어린 다른 사람이었다.


카페 테이블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시를 읽고, 혹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거나 기분 좋은 웅얼거림 속에서 단편적인 상상들을 하는 건 7개월 만이다. 그동안 거의 매일 그리워했던 건 블루보틀이나 훔볼트와 같은 곳으로 가서 사람들 속에 앉아 있는 것이었다. 집에서는 종종 의욕을 잃곤 하지만 이렇게 밖으로 나오면 나는 건강해지고 수다스러워진다.


수많은 이미지들, 기억들이 머릿속에서 떠오른다. 이것들을 어떻게 붙잡아 둘 수 있을까? 나는 기묘한 것들을 떠올린다. 이런 것들도 영감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것들은 전부 웅얼거림들 속에서부터 온다. 나는 그것들을 이미 경험했다고 느낀다. 그리고 동시에 이 순간 경험하고 있다고 느낀다.


누군가 가까운 건물의   어딘가에서 피아노를 연습하고 있다. 반대편 건물의 유리창들로 해가 비치고 나는 그늘 속에서  따듯한 색깔들을 본다. 많은 사람들이 이쪽으로 혹은 저쪽으로 걸어간다. 가끔 나는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 그것도 모두 서로 다른 다양한 존재들이 있다는 사실이 정말로 놀라운 일이라고 느낀다.  여유로움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피아노 소리와 햇살 속에 있을 것이다. 혹은 웅얼거림들 속에 있을 것이다. 그런 것들이 둥글게 보이지 않는 공간을 형성하고  속에서  존재는 다른 존재들을 받아들일  있는 여유를 가지게 된다. 철망으로 덮인 환풍구를 통해 지하철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약간 텁텁하고 미지근한 바람이 솟아오르고  위를 수많은 사람들이 걸어간다. 가엾게도 겁을 먹은 개가  옆을 지나가지 못하고 이내 바닥에 납작하게 엎드린   이상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 턱수염이  주인은 다소 힘겹게  개를 질질 끌고 간다. 치즈케이크 굽는 고소한 냄새가 풍겨오고 참새들이 가끔씩 테이블 위로 날아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나를 쳐다본다. 내가 치즈케이크를 먹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이걸 쓰는 동안 옆 테이블의 다섯 가족은 이미 떠났고 그다음으로 찾아왔던 두 명의 노부인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처음 도착했을 때 그들은 직원에게 백신 접종 확인증을 제시하고 자리에 앉았는데 직원은 정말 잘 된 일이군요라고 말했다. 나는 잠시 내가 이 상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생각해야 했다. 나의 결론은, 이 상황은 별로 시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삶의 비현실성을 보여준다는 것이었다. 다시 한번 지하철이 지나가고 길바닥의 철망에 붙어 있던 작고 흰 직사각형의 냅킨이 깃털처럼 순식간에 날아올랐다. 거의 이 층 높이까지 떠오른 냅킨은 낙엽처럼 곡선을 그리며 천천히 떨어졌다.


그 순간 나는 스물여덟의 천국들에서 다음 대목을 읽고 있었고 어쩐지 조금 서글퍼져서 다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카페의 옆 테이블에서 사람들은 카드놀이를 하고 체스를 두네.

먼 훗날 낮과 밤들이 그렇게 길 줄 미리 알았다면 나도 다른 이들과 게임하는 법을 배웠을 텐데.

매거진의 이전글 2021. 5. 11 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