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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석범 Jun 07. 2021

2021. 6. 5 토

트랩타워 파크에서 미켈라와 그녀의 친구들을 만났다. 발음이 정확하고 씩씩한 소피아는 연극배우고 던은 다름슈타트에서 미켈라와 함께 에라스무스를 했다고 했다. 초록색 브래지어 차림의 미켈라가 뛰어왔고 소피아가 너는 이제 우리 가족이야라고 말했다. 던이 강물에 들어가 수영을 하고 있는 사이 미켈라가 새 일은 어떤지 이것저것 물었다. 그녀를 만난 건 한 달 만이다. 그녀는 행복해 보였고 들뜬 상태였다. 그늘진 곳에 앉고 싶었지만 곧 바람이 불어 기분이 좋아졌다. 나는 타는 거 싫은 데. 미켈라가 물었다. 근데 왜 선크림을 안 발라? 끈적거리는 게 싫어서. 넌 항상 뭘 바르잖아. 그건 핸드크림이라 괜찮아.


옆에 혼자 앉아 있는 남자가 계속 조인트를 폈고 그 냄새가 우리 쪽으로 불어왔다. 나는 강둑에 걸터앉아 물에 발을 담갔다. 미켈라는 던에게 우리 집에서 지낸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강물을 보고 있던 소피아가 내게 말했다. 난 이미 들은 얘기야. 내가 대답했다. 난 내 얘기라 안 들어도 돼. 우리는 소피아가 최근에 치른 수술과 언어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갑자기 미켈라가 제네바의 한 병원에 입원 중인 자신의 할머니와 영상통화를 하며 우리 사이에 끼어들었고 곧 소피아는 전화를 건네받아 유창한 이탈리아어로 그녀와 통화하기 시작했다. 끼어들어서 미안. 미켈라가 말했다. 나보다 소피아랑 더 친한 것 같아. 둘은 실제로 만난 적도 없는데. 내가 대답했다. 소피아가 너보다 이탈리아어 더 잘하는 거 같은데.


곧 던이 일하러 가야 한다며 일어났고 미켈라는 소피아를 위해 옆 남자에게 담배를 얻으러 갔다. 양 팔이 뜨거워진 나는 잠시 그늘진 곳으로 가 서 있었는데 맨발바닥 아래 잔디가 약간 축축했다. 강물이 여기까지 올라온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혹은 지나가던 개가 오줌을 쌌거나. 남자는 담배 대신 조인트를 말아줬고 소피아는 그의 곁으로 가 한동안 대화를 나눴다. 미켈라는 오줌을 싸야 한다며 휴지를 들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소피아가 다시 돌아왔고 담요 위에 누워 눈을 감고 있던 그녀가 잠시 뒤 말했다. 석범 아직 거기 있어? 아직 있지. 나도 그녀 옆에 누워서 물었다. 그래서 무슨 얘기 했는데? 그냥 인생. 그의? 응. 팬데믹 이후에 직장을 잃었대. 슬픈 일이야. 그래서 헤어지기 전에 손을 꼭 잡아줬어. 그런 표시를 해주고 싶어서. 내가 말했다. 이상하지 않아? 소셜 디스턴싱이 우리를 오히려 더 가깝게 만들어 준 게. 소피아가 말했다. 우리 모두는 근본적인 하나의 공통점을 가지게 됐어. 모두에게 동일한 경험. 이런 일은 전쟁 이후 없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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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시에 K를 만나기 위해 홀츠마크트로 갔다. 먼저 도착한 그는 30명쯤 줄이 있다고 했는데 실제로 보니 50명은 족해 보였다. 기다리면서 K는 얼마 전 만난 천재 혹은 또라이 혹은 둘 다인 자신의 대학 동기 얘기를 했다. 노예 제도에 찬성하는 그는 건축을 공부하다 때려치우고 미술을 좀 하다가 지금은 현대 음악을 전공하면서 작곡을 하고 있다고 했다. 이중국적자인 그의 목표는 버지니아로 이주해 큰 농장을 산 뒤 그곳에 프랑스식 궁전을 짓고 북유럽 출신의 아름다운 부인을 구해 부엌에서 나오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했다. K가 도착하기 전에 그는 이미 샴페인을 한 병 주문해 놓은 상태였는데 저녁 값으로 나온 300유로를 쿨하게 계산했다고 했다. 나는 K에게 그런 또라이면 자주 만나서 비싼 밥이나 얻어먹으라고 했다.


홀츠마크트는 미켈라가 예찬한 것에 비하면 다소 관광지스러운 느낌이 있었다. 인원 제한이 있음에도 지나치게 북적거렸고 재미는 있지만 편안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맥주를 주문하는  안에 들어간 상태에서도 줄이 너무 길어 결국  번째 잔은 포기하고 햄버거를 먹었다. 근처 주유소에서 하이네켄  팩을  박물관섬 쪽으로 움직였다. 훔볼트 포럼 맞은편의 강가에 앉아 느긋하게 맥주를 마시니 그제야 마음이  편해졌다. 중간중간 너무 많은 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그다지 말을 멈추지도 않았다. K와는 희한한 공통점들이  있다. 영국과 독일에서의 생활, 클라리넷, 영화 취향과 같은 것들. 나는 그에게 스티븐 달드리의  아워스와  리더, 레오 카락스의 홀리 모터스,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페이버릿과  랍스터, 이시이 유야의 행복한 사전과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 미셸 공드리의 이터널 선샤인, 마크 포스터의 스트레인저  픽션, 로버트 에거스의  라이트하우스, 아리 에스터의 헤레디터리와 미드소마, 이안의 와호장룡과 센스  센서빌리티, 올리비에 아사야스의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  멘데스의 레볼루셔너리 로드, 노아 바움백의 프란시스 하와 그레타 거윅의 작은 아씨들,  토마스 앤더슨의 팬텀 스레드와 같은 제목들을 알려주었고 일일이  이름들을 왓챠에 저장한 그는 전부  궁합 별점이 4 이상이라며 신기해했다.


K는 종종 L을 떠오르게 했다. 요즘 다프트 펑크를 다시 듣고 있어 그에게 가장 좋아하는 곡을 틀어줬다. 너는 어디로 가고 있냐는 뜻인데 베리 디스코이기도 해. 멋지지 않아? 포럼 앞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살사를 추고 있었고 K는 국제 학교 시절 기숙사 뒤편 언덕에서 대마를 한 얘기를 했다. 그는 자신의 친구와 그의 FWB와 쓰리섬을 하려고 친구 방으로 들어가려던 찰나 복도에서 친구의 여친에게 딱 걸리는 바람에 결국엔 친구의 FWB와 둘이 잔 게 첫 경험이라고 했다. 수학여행 숙소 천장에 소주를 숨기는 한국 고딩들은 애송이들이다. K는 학교 농구팀 출신인데 국제 경기 결승전에서 어깨가 빠진 적이 있다고도 했다. 그는 경기장 입구에서 앰뷸런스를 기다리던 중 스스로 어깨뼈를 꼈고 다시 시합에 들어가 결국 우승했다. 그런 일이 가능하리라고는 상상해 본 적도 없다.

살사를 추던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나른하고 기분 좋은 여름밤. 돌바닥의 열기가 식었고 K와 나는 베를리너 돔 앞에서 새벽 두 시쯤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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