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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석범 Jul 01. 2021

2021. 6. 30 수

하루 종일 비가 내리고 있다. 체리가 그 사진을 보냈기 때문에 홍콩식 칠리크랩 먹는 상상을 하며...



II

내가 렌더 회사에 보낼 가이드 이미지를 작업한 건 생각해 보면 터무니 없는 일이다. 나는 렌더 경험이 전무할뿐더러 항상 렌더 이미지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내가 전체 모델을 정리하고 터치업을 시작했을 때가 라이노를 다루기 시작한 지 2주밖에 안 된 시점이었기 때문에 그레고리가 너 정말 빠른거야! 라고 했을 때는 그다지 겸손한 척 아니라고 하지도 않았다. 사실은 스스로도 내가 이런 걸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뿌듯해하고 있었고 이로써 시대착오적이게도 아날로그 작업을 선호하면서 사용하지 않았던 그래픽 툴들에 대한 일종의 자격지심을 어느 정도 해소했다. 내가 자랑스럽게 이반에게 작업한 이미지를 보내주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Holy shit! You are one of us now.

톰과 상의 후 나는 몇몇 재료의 속성을 결정했고 그레고리는 최종 이미지를 레퍼런스 사진들과 함께 렌더 회사에 보냈다. 그중 한 곳인 아티팩토리랩의 이미지들은 천박한 하이퍼리얼리즘이 아니면서도 굉장히 사실적인데, 그와 동시에 어떤 묘한 환상성을 풍기는 매력이 있다. 거의 시적인 그 차분함과 깨끗함은 렌더 이미지에 대한 내 선입견을 재고하도록 했고 그들이 며칠 뒤 보내온 첫 드래프트는 우리 모두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은 나에게 완전히 새롭고 흥미로운 경험이다. 이 과정을 통해 내가 만들어낸 이미지는 나 자신에게도 새로운 것이다. 이걸 내 친구들에게 보여준다면 그들은 과연 이 이미지가 내가 만든 것이라는 사실을 알까? 나는 그것이 궁금했다.



이 기록을 쓰면서 설계 대신 디자인 혹은 이미지라는 단어를 고수하는 이유는 나는 평면에 거의 관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또한 나에게는 완전히 새로운 접근법이었다. 세 명의 건축가가 각각 한 개씩 건물을 설계하고 있다고 말했을 때 미켈라는 처음에 그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녀에게 팀 설계란 모든 디테일을 팀원들이 그때그때 서로 상호 참조하면서 함께 도면을 발전시켜나가는 개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CPT의 규모에서 그런 것은 불가능했고 우리는 각각 하나의 건축적 요소를 맡아 나름대로 만들어낸 뒤 나중에 합체시킬 수밖에 없었다. 특히 지붕이나 파사드에 대한 접근법에 있어서 한 번도 평면이나 섹션과 그것들을 독립적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나로서도 처음에는 이러한 절제술에 의구심이 들었다. 건축물을 실용적으로 부품화시켜 다루는 것이 K가 말했던 스튜디오와 사무소의 괴리일까?

그러나 더 많은 시간이 있었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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