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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석범 Mar 19. 2022

2022. 3. 6-19

건축과 문학을 일종의 헤겔적 모순으로,  변증법을 통해 지양되어야 하는 관계로 파악하고자 하는 시도는 단지 내가 무엇을   있는가 하는 고민, 그리고 그에 따른  안의  본능에 관한 사색에서 발단한 것이다.  다소 무모하게 느껴지는 기획을 위해서는 먼저 독립적인  작업대화편, 성스러운 괴물, 도서관의 픽션 하나의 연속선상에 위치시키는 회상이 필요하다. 기억은 사유의 집중이며, 우리를 본질에서 붙들고 있는 사려되어야  것이 그것의 본성상 사려되어야  것인 한에서 사려된다면 그것은 회상이라는 선물이 된다고 했던 하이데거의 말을 염두에 두자. 이러한 사유는 — 기억의 본성에 따라 — 서술적이다.  나는  결말이  순간들을 끌어당겨 붙잡도록 하는 하나의 이야기 쓰고자 한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신기하게 만들어서는  된다는 사르트르의 경고를 마음에 새기면서도 나는 의식적으로 순간과 순간을 연결시키는 모험을 강행하려 한다.  이야기가 앞으로 내가 가야  길을 열어 보여줄 것이기 때문이다.




I. 서커스라는 사건을 매개로 원과 불에 대한 여러 현상학적 고찰들이 이루어진다. ‘대화편’은 대화자들의 의식의 흐름에 따라 이 고찰들을 대화의 형태로 연결시키는데 그것은 설계도로만 존재하는 어떤 건물의 구축된 미래를 회상하는 내용으로 전개된다. 지어지지 않은 건물의 지어진 과정을 다루는 이 기이한 대화는 설계—상상—된 건물의 형상을 문학적 서술을 통해 파악하고자 함으로써 니체의 문학론과 칸의 형상적 탐구를 결합한다. 이것으로 글쓰기—구체적으로 건축가의 글쓰기—를 사유하는 기초가 마련된다. (2017)




II. ‘성스러운 괴물’에서 설계와 서술(敍述 글을 지어 폄)은 동시적이며 교차적이다. 건물의 이러저러한 요소들—굴뚝, 벨벳 커튼 등—은 어떤 사건을 암시하고 동시에 그 사건의 행위자는 건물을 변형시킨다. 사건의 어디까지가 인격이며 어디서부터가 건물인가? 인격은 건물이라는 사건을 통해 서술되고 건물은 인격이라는 사건을 통해 설계된다. 이 교차대구법은 최종적으로 책의 구조—폈을 때 왼편에 글, 오른편에 그림을 보여주는—로써 가시화된다. 성스러운 교회당 속에 각자의 집을 짓는 10인의 입주자들에 대한 이야기, 혹은 10인의 침입자들에 의해 변형되는 콘크리트 괴물에 대한 이야기는 건축이라는 사건에 대한 알레고리이며 이 사건들의 축적이 표방하는 것은 게니우스 로키, 즉 현재이다. (2019)

 



III. 한 건축가의 발치에 옛 도서관 터가 있다. 사막의 모래알들 속에 잠들어 있는 이 도서관을 복원하기 위해 그가 수행하는 고고학적 발굴은 역사가 이미 문학의 분과라는 측면에서 보르헤스가 처음 세상에 알린 돈키호테의 저자 피에르 메나르의 그것과 동일한 것이다. 복원가로서의 건축가는 독자로서의 작가이며 ‘도서관의 픽션’은 이 비현실적이면서도 필연적인 작업을 기록한다. 이때 ‘픽션’은 과거의 반복 혹은 재창조와 연관이 있다: 건축이 문학을 통해 시도하는 것은 장소의 팔리노디아이다. 비밀에 부쳐진 작가-건축가의 최종 목표는 일종의 이중적 신화이며 작업이 완료되었을 때 비로소 ‘도서관’의 진정한 의미가 밝혀진다. (2020)





이 일련의 글쓰기 시도는 사이비-과학적인 성격을 띠는 분석, 참조 문헌의 요약 등과 같은 것으로 시작해 점점 복잡하고 세밀하게 다듬어진 픽션의 방향으로 고차원화되었다. 다시 말해 그것은 점차 문학의 양상을 띠게 된다. 그 가장 발전된 예가 ‘도서관의 픽션’으로, 도서관이 재구축되는 과정은 역사의 기록에 교묘히 짜여 들어간 픽션을 통해서이며 건축과 문학의 범주는 서로를 가로지른다. 이때 건축가는 과거를 회상하는 동시에 재창조하여 들려주는 자, 즉 구전가이다.


이러한 건축가의 역할에 대한 필연성을 우리는 시와 음악의 여신들인 아홉 뮤즈의 어머니이자 기억의 의인화인 므네모시네에 대한 하이데거의 사유에서 발견할 수 있다.


    연극과 춤, 노래와 시가 기억의 여신 므네모시네의 품 안에 있다. ... 기억은 사유된 것에 대해 생각한다. ... 기억, 즉 사유되어야 할 것에 집중한 회상은 시작(詩作 시 지음)의 원천이자 근거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작의 본질은 사유에 기인한다. 이것을 신화가, 다시 말해 구비 신화가 우리에게 이야기해주고 있다. 이 신화의 이야기는 가장 오래된 것을 말하는데, 가장 오래된 것이 시간 계산상 가장 이르기 때문만이 아니라 오히려 그 본질상 애초부터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가장 사유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남아 있기 때문에 그렇다. <사유란 무엇을 말하는가?>


즉 이야기, 가장 오래된 것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건축가의 궁극적인 목표는 사유이다. 이것은 그의 무의식에 오랜 기간 잠재해온 의문, 바로 건축은 과연 사유되고 있는가 하는 의문에 응답하는 사유이다. 일반화되고 단순화된, 일종의 도형 게임으로 전락한 관습적인 건축 설계 전반에는 근본적인 결핍이 도사리고 있다. 기하학적 연산은 지어지는 사물의 표상만을 다루기 때문이다. 이 결핍의 문제를 하이데거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리가 건축을 그것의 존재에서 인지하는 한, 우리가 — 근대적으로 말해 — 대상들을 그것들의 대상성에서 표상하는 한, 우리는 이미 사유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방식으로 이미 오랫동안 사유해왔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축의 존재가 현전성으로 나타나고 있을 때 그 존재가 어디에 근거[터]하는지가 사유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한, 우리는 아직도 본래적으로 사유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건축의 존재의 본질 유래는 사유되고 있지 않다. 본래적으로 사유되어야 할 것은 보류된 채 남아 있다. 그것은 아직도 우리에게 사유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되지 못했다. <사유란 무엇을 말하는가?>


기하학적 설계는 건축을 그것의 존재에서 인지하는 한도 내에서만, 즉 그것을 표상하는 한도 내에서만 사유한다. 그러나 건축의 존재는 계속 보류된 채로 남아있다. 우리는 비로소 건축가의 문학적 글쓰기가 바로 이 건축의 존재를 사유하기 위한 시도임을 깨닫게 된다. 반기하학적인 것으로서의 언어는 그것의 비은폐성을 통해 설계도 이면에 은닉되어 있는 존재를 지시한다. 이 지시 속에서 사유의 집중인 기억의 서술적 본성으로 인해 — 필연적으로 — 건축가의 언어는 점차 이야기로, 그리고 로 거듭난다. 이미 ‘대화편’에서 ‘도서관의 픽션’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문학적 발달이 이를 방증해 주고 있다. 그것이 미래를 지시하는 것으로 시작해 종국에는 신화적 성격을 띠는 것으로 변모한 사실은 다시금 반추해 볼 가치가 있다. 이는 사유를 시도하는 건축가는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운명적으로 시의 영역에 들어서게 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로써 우리는 출발점으로 되돌아왔다. 궁극적으로 건축가의 시 지음으로 요약되는 바로 이러한 사태가 건축과 문학을 일종의 헤겔적 모순으로, 즉 변증법을 통해 지양되어야 하는 관계로 파악하도록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건축가는 기하학적 설계의 결핍을 해소하고자 문학의 도움으로 건축의 존재 유래를 좇는다. 서로 모순의 양 극단에 있으면서 (건축과 문학의 모순적 관계는 이미 11월 28일의 사유에서 밝혀졌다) 상호 대립적으로 — 위에서 언급된 세 작업물에서 이미 보여지고 있듯이 — 서로를 생산하는 이 두 계기의 역동적인 관계 속에는 이미 변증법의 특정한 구조가 들어있다. 그러므로 바로 이 사유 방식을 통해 건축과 문학의 관계를 정립하고 동시에 지양하려는 시도는 타당해 보이며 나는 심지어 그것이 필요 불가결하다고까지 주장하고자 한다.


이 기획을 위해서 수행되어야 할 첫 번째 과제는 그 근본적인 모순 관계를 통해 문학이 건축의 반명제임을 밝히는 것이다. 아도르노에 따르면 ‘변증법적 반명제(문학)는 사유가 다루어야 하는 명제(건축)에 맞서 외부로부터 설정되는 반대 명제가 아니라 명제 자체로부터 나오는 것으로, 이러한 비동일성을 사유하려는 시도는 그 자체의 유한성을 깨닫게 되고 이로써 스스로를 넘어서 나아가게 하는 지점으로까지 사고를 밀고 나가게’ 된다. 사유를 따라 건축의 존재-터에 도착하고자 하는 건축가에게 필수적인 것이 바로 이 도약이며, 이러한 개념의 동역학적 운동이야말로 건축의 존재에 대한 사유 가능성을 보증해 주는 것일 것이다. 이때 소위 이 변증법의 은 건축과 문학의 어떠한 공통점을 파악하는 것이 아니다: 헤겔은 합을 부정의 부정이라고 설명했는데, 그 정의에 따르면 건축으로부터 끄집어낸 그 대립물로서의 문학에 담긴 비진리가 규정됨으로써 최초에 부정되었던 건축 속의 진리 계기가 다시 타당성을 지니게 된다. 다시 말해 건축과 문학의 변증법으로 우리가 목표하는 것은 문학이라는 계기를 통해 건축의 결핍이 자체적으로 해소되도록 하는 것이다. 이러한 합의 상태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예견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또한 불필요한 일이지만 한 가지 매우 중요한 일이 일어나게 될 것임은 확실하다. 건축가는 건축의 존재를 사유하게 될 것이다.


아마도 존 헤이덕은 이러한 사태를 예견했고 준비했던 거의 유일한 건축가였던 듯싶다. 그는 다른 대부분의 건축가들이 표방하듯 대리석으로 시를 쓰지 않고 언어로 시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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