뉘른베르크에서 돌아오는 기차는 넓고 쾌적했다. 이걸 그 안에서 썼다면 좋았을 텐데. 유채꽃밭이 점점 늘어났고 지평선이 나무들에 가려져 전봇대 다섯 개가 지나가는 순간 동안 밖은 거대한 노란 강처럼 보였다. 그 강을 거슬러 지금 떠올리는 것은 남색이다. 바다가 아닌 십자가 모양의 세 예수상이 걸려 있던 어두운 방의 벽이 남색이었다. 금이 간 고목으로 된 세 인물들은 쪼그라든 모습으로 귤색 빛을 받으며 약간 슬픈 얼굴을 하고, 그러나 고통의 흔적 없이 거기에 매달려 있었다. 그 방 한 층 위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지구본이 있는데 그 위에 칠해진 바다는 청록색이다. 이 진귀하지만 생각보다 감동적이지는 않은 물건은 우리가 지구를 묘사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가 천국을 그 위에 투영했기 때문이라고 했던 스트라보의 말을 생각나게 한다. 칼비노는 베니스의 수도사 코로넬리가 만든 — 지름이 12미터인 것을 감안하면 건축했다고 쓰는 것이 바람직한 — 지구본 앞에 섰을 때의 경험을 떠올리며 이 말을 인용했는데 과학적이기 때문에 더욱 시적인 이 표현은 내게 지구본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었다. 때때로 감동적인 것은 사물 자체가 아니라 누군가 그것을 설명하는 방식이다. 베하임의 청록색 대양은 점점 작고 네모나져 오르페우스의 발밑에 있던 빨간색 천이 된다. 그 천 위에는 먼저 에우리디케의 가녀린 발이 있었고 지하세계의 세 대장장이들은 이들 두 시신을 끌고 각 한 차례씩 극의 처음과 끝에 무대를 돈다. 그것은 마치 죽음이 수미쌍관이라고 말하는 것 같고 아마도 바로 그 이유에서 이 반복에는 어딘가 대단히 필연적이고 숭고한 면이 있다. 무대 오른쪽에는 앙상하게 마른 흰 나무가 눕혀져 있는데 이 나무는 페그니츠강가에서 본 수양버들과 자못 대조적이다. 늘어진 가지들이 수면에 닿을 듯 말 듯 했던 버드나무는 연두와 반짝거리는 빛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다소 억지스럽지만 연두색 속에서 보라색을 끄집어내려고 한다. 그 색은 두 다리 끝에 발굽이 있는 악마를 밟고 선, 날개가 하나뿐인 천사가 들고 있던 불로 된 창의 색이었다. 나머지 부분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전체로서 그 물건은 화려하게 장식된 시계나 서랍장 같은 것이었을 수 있다. 이 작은 천사 혹은 기사는 길고 보랏빛인 별똥별의 꼬리 같은 것을 손에 쥐고 그 꼭대기에 홀로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