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볕이 작열하고 온갖 사람들이 무언가를 위해 흥정하는 마우어파크 벼룩시장에서 릴케의 일기를 샀다. 책 머리는 빛바랜 연두색이고 앞표지 가운데 금색 이니셜 R.M.R.이 찍혀 있다. 누런 종이에서 오래된 책방 냄새가 나는 가벼운 책이다. 돌아오는 트램 안에서 처음 펼친 부분의 몇 문장을 여기에 번역해둔다.
나는 이곳에 어떠한 기억도 없다. 두 눈은 감기지 않는다. 내 시선은 모든 움직임을 따라 크게 가고 모든 평정 속에서 체류한다. 그리고 움직임과 평정은 끝없이 많다. 이곳의 사물들은 무한한 단순함으로 우리를 붙잡고 나는 기꺼이 그들에 붙잡히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