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레스덴부터 몇 주간 소홀했다. 그날그날 있었던 일을 순서대로 적는 것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한다면 덜 인위적으로 기록할 수 있을 텐데. 그러나 그러려면 그 기록할 만한 에피소드와 연관되는 어떠한 생각이 있어 그 주변으로 내가 쓰고 싶은 사소하고 작은 것들이 유기체처럼 달라붙어야 한다. 그런 결속된 것을 매일같이 쓸 수 있다면 얼마나 신날까. 대부분 일기를 쓰지 못하는 경우는 쓸 일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것들이 달라붙을 생각이 없어서다.
월요일에 아빠가 왔고 집은 확실히 북적거리고 있다. 다행히 매트리스가 아빠 허리에 불편하지 않아 둘이 내 큰 침대를 쓰고 나는 사둔 토퍼를 바닥에 깔고 잔다. 금요일까지는 어차피 다들 일들이 있었기 때문에 금요일부터 주말 사흘 동안 이것저것 했다. 지난 주 혼자 시간을 즐길 틈이 있었을 때 뉘른베르크의 미술관에서 엄마가 사준 울프의 책을 몇 쪽 읽었는데 (그리고 그것은 곧바로 충동적이고 대단히 기대되는 어떤 일로 이어졌다) 어제 게멜데갤러리에서 내내 그 생각을 했다. 색들로 가득 찬 방에 들어서는 순간 우리는 정말로 온몸이 눈인 태초의 곤충이 되는 것 같다. 그런 하나의 강력한 기관인 상태로 나는 드레스덴에서 느꼈던 홀바인에 대한 감탄을 다시금 느꼈다. 아빠는 재밌게도 얼굴보다는 물건들이 인상 깊다고 한다. 울프와 그녀의 영국인 친구들은 초상화의 얼굴에 대해 언뜻 상투적이지만 곰곰 생각해 볼 만한 언급을 했기 때문에 나는 그와 비슷한 깨달음을 얻기 위해 홀바인이 그린 여러 얼굴들에 집중하여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 순간 눈이었던 내 이마와 입과 그 외 몸의 여러 기관들이 그 사람들의 인생을 그림 속에서 꿰뚫어 보았다고 말하기는 의심스럽지만 어쨌든 우아한 색감과 사실적이면서도 어딘가 시적인 사물들에 매료되었다고는 말할 수 있다. 기관이라는 단어 속에는 같은 맥락에서 콘체르트하우스에서 본 조성진의 손도 있다. 그날은 엄마 아빠의 결혼기념일이었다. 피아노를 치는 조성진은 그 순간 온몸이 손인 곤충과 다름없고 이런 상상은 쇼팽이 흘러나오는 그 광경을 어떤 진기한 것으로 만든다. 슈만의 고독한 꽃은 얼마나 고독하고 아름다웠던가! 라고 나는 그 꽃의 내음을 떨리는 하나의 거대한 귀로 맡았던 당시를 회상하며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