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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석범 Apr 10. 2023

2023. 4. 9 일

해가 비친다. 여자가 남자의 입술을 손끝으로 만지고 남자가 그 손등 위에 가볍게 키스한다.



일기들을 정리하던 중 나는 지극히 현실적인 존재임을 깨닫는다. 어제 읽던 페소아와 비교하면 더더욱. 이를테면 페소아는 다음과 같이 쓴다. ‘오로지 꿈만 꾸었을 뿐이다. 꿈만이, 오직 그것만이 내 인생의 의미다. 내면의 삶이 아닌 다른 것에 진지한 관심을 기울인 적이 없다. 내가 있는 곳에 없는 것과 내가 결코 될 수 없는 것에 늘 속해 있었다.’ 반면 나는 다음과 같이 쓰는 것이다. ‘이 계획서가 자신의 소명을 다한 지금 나는 그다음의 계획서를 쓴다. 막연했던 꿈은 조금 더 현실적인 것이 되었고 그것을 씀으로써 나는 그것을 길로 만들 수 있는 힘을 갖게 된다.’ 

이렇게 부단히도 삶의 전략을 수립한다.


그러나 내가 별로 현실적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페소아의 표현대로 내가 말하는 것이 꿈이 아닌 삶이라면 그건 살아남기 위해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종종 현실이라는 어감은 타협의 냄새를 풍긴다. 그건 현실이 조건인 한에서 그렇다. 반대로 현실은 기회가 되기도 한다. 몽상가는 그 기회를 이용해 꿈을 지을 것이고 건축가는 집을 지을 것이다. 그럼으로써 둘 모두 자신의 내면의 삶에 기여한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알았고 단순히 그것을 할 수 있기 위해 노력했을 뿐이다. 페소아가 몽상가로서 꿈만 꾸기 위해 노력했다면 그는 자신의 현실에 충실했던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나 역시 내 현실에 충실한다. 동시에 그것에 안주하려 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나 역시 몽상가다. 내가 꿈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은 그걸 포부라고 부른다. 페소아가 꿈꾸기를 원했던 것처럼. 그 포부는 일련의 현실적인 동사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오스카 와일드는 이런 삶의 전략을 권장하는 투의 아포리즘을 말했던 것 같다. 우리의 미래를 명사로 ─ 건축가로 또는 작가로 또는 몽상가로 ─ 한정하지 말자는 것이다.


막연했던 꿈이라는 표현은 이런 포괄성을 염두에 둔 의미였을 것이다. 당시 명령조로 썼던 1번 계획은 올해 건축사를 취득하는 것인데 이 계획은 올해 말 혹은 내년 초에 이루어질 것이다. 이로써 나는 현실을 기회로 다룰 수 있는 능력을 조금 더 얻게 된다. 그러나 동시에 내 포부는 더 막연한 것이 된다. 정교해질수록 환상성을 띠게 되는 불가사의한 그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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