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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속선 Jul 12. 2023

음악과 정신 탐구 4: 현대 주류음악

2020-12-31 11:11:02

음악에는 장르적 구분이나, 종교, 민족, 시대, 문화라는 큰 카테고리가 있지만, 의식상태에 따른 관점으로 분류를 짓는 게

가능하다. 

요즘에 젊은 음악 주 소비층에 횡행하는 일렉트로닉, 테크노, 소위 말해 클럽 음악을 들어 보면 어떤가? 

메마르고 딱딱한 전자음, 빠른 템포와 계속해서 듣는 이를 격양시키는 격렬한 비트, 가사 내용을 들어 보면, 주로 인스턴트식 연애와 결별 이야기, 폭력, 범죄, 난잡스런 성, 자포자기식 인생, 타락, 약물, 일상 속에 시시한 이야기들, 아티스트의 지극히 사적인, 시시콜콜한 이야기 등의 될대로 되라는 식의 범벅 덩어리가 아닌가. 

이러한 음악으로 말미암아 아티스트와, 청자, 모두 각박한 인생 속에서 참길을 찾지 못 해 방황하는, 무척 혼란스러운 상태임을 엿볼 수 있다. 

내 삶의 희망이 보이지 않으니, 이 무질서하고 격렬한 음악 속에 젖어서 마취를 하고자 하는 것이다. 

인생을 소모하는 수렁 도가니이다. 

쉽게 표현하자면, 인생의 참의미도, 보람도 없는 될대로 돼라 식의 인생낭비의 소리인 것이다. 


허나, 난 이 음악을 꼭 나쁘게 표현하는 게 아니다. 

사람이 살면서 겪는 아픔을 어찌 나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런 음악을 만들고 듣는 이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이 시대의 젊은 이들의 아픔과 방황을 헤아리고 어루 만져야 한다는 것이다. 

클럽에 가는 이들은 어떤 부류들인가? 

그들 나름대로 잘 살아 보기 위해 노력했지만, 좌절과 고단함에 지쳐서, 그 걸 나름의 방책으로 달래기 위해 온 것이다. 

사회에서는 대화가 안 통하고, 나를 이해해 주지 않지만, 클럽에서는 나와 같은 사람들과는 그래도 말이 통하고, 자신의 아픔을 헤아려 주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가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내 삶이 순탄하고 잘 풀리는데, 그런 곳을 연신 가는가? 

이따금 흥이 나면 어울리는 사람들과 갈 수는 있겠다. 

하지만, 그런 자들은 클럽에 자주 가기는 싫다. 

내 삶의 테두리 내에서 풍요로운데, 그런 혼돈스러운 데를 왜 또 가는가 말이다. 나에게 주어진 일과 사명이 즐겁고 보람차다. 

가정에는 나를 반겨 주는 사람이 있고, 대화도 잘 된다. 

내일이라는 또 희망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그 내일은 또 새로운 무언가가 있어서 설렌다. 

이렇듯, 가까운 복단지를 놔 두고, 내가 그런 아비규환의 통돌이 속에 왜 자처해서 들어 가는가?


  

본론으로 돌아와 보자. 


클럽 음악은 현 시대 젊은이들의 방황과 각박한 정서를 표출하는 것이다. 


계속 클럽에서 대중들과 어울리면서 이런 음악을 들으면, 나도 모르게 동화가 되어 간다. 


인간 깊숙히 내재된 동물적 육감, 저급한 수준으로 정신이 하락하게 된다. 


나는 이 것을 타락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타락은 코 앞의 어려움이 풀리는 듯 싶지만, 그 뒷맛은 더욱 씁쓸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 밑바닥을 가늠할 수 없다. 


내가 이런 음악을 주로 듣는다면, 얼른 내 자신부터 돌아 보고, 주변의 신뢰할 수 있는 지인들과 고충을 나눠 보도록 하자. 


음악 하나로, 이렇게 내 자신을 진단할 수 있는 것이다. 




클럽 음악만이 현상이 아니다. 


외에도, 사탄을 숭배한다는 블랙 메탈, 반 사회적이고 범죄를 조장하는 일부 힙 합, 하드코어는 온갖 불만과 욕설 투성이다. 


서양의 주류를 이루는 팝이나, 국내 아이돌 음악은 시각적으로 자극, 선정적, 폭력적 표현으로 난무한 지가 이미 오래이다. 


이 지구 상의 온갖 부정과 무질서가 음악으로 표출되고 있는 현상이다. 


우리가 참다운 길을 찾지 못 하고 방황하면, 그 답답함이 쌓여서 표출될 때 광기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러한 음악의 표면만 보고 탓해서는 안 된다라는 것이다. 


이 시대를 살아 가는 우리에게는, 이런 미쳐 가는 음악이라도 듣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대중들의 수요가 아티스트들의 작품으로 공급이 되고, 제작사들도 이런 음악이 팔리니까 제작을 지원한다. 


당연한 관계성이다. 


음악만이 문제가 아니고, 듣는 대중들도 한 통속이라는 얘기이다. 




이렇게 저속한 음악에 오래 물을 들인 사람들한테 서정적이고 감동스런 음악을 들려 줘 보자. 


지루하고 따분해서 못 들어 준다고 할 것이다. 


그림이나, 심리테스트로 그 사람의 성격과 유형을 파악한다고 하는데, 음악 또한 그 카테고리에 들어 가야 한다. 


음악이라는 관점으로 접근하는 것 또한, 한 인간의 상태를 파악하는 데에 객관성을 더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음악이라는 현상을 탓하기 전에, 대중들이 지금 필요한 것은 무엇인 지, 가야할 방향을 바르게 제시할 수 있는 지식인들이 활동해야 하는 것이다. 


대중들과 소통하면서 그들의 답답함을 해결해 줄 수 있다면, 이러한 음악들은 자연스레 멀리하게 된다. 


아름다움과 자연, 문화적이고 수준 높은 음악으로 시선을 돌리게 된다. 


음악으로 치유를 한다고 해서, 편안한 음악, 클래식을 들려 주자는 파들이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아까와 같은 이유로 회의적이다. 


음악 자체의 힘으로는 한계가 있고, 삶의 방향을 틀어야 하는 것이 근본적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문제아들한테는 학교 수업 시간에 들려 주는 동요와 클래식이 답답하게 들린다. 


삶의 어려움이 풀리면, 재미와 즐거움은 자연스레 따라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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