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논문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속선 Jul 12. 2023

위안부 문제와 윤미향 비리 3

2021-01-02 18:20:04


강제 징용 문제도 있지만, 이 번에는 문제가 되고 있는 위안부 문제만 국한해서 바라 보자. 


그 동안에 위안부 할머니들은 어떤 활동을 했는가. 


많은 분들이 고령으로 세상을 뜨셨지만, 남은 평생을 보상과 사과를 일본에 요구하는 일생을 사셨다. 


물론, 당사자의 고통을 어찌 다 헤아리겠느냐마는, 할머니 손에 쥐어진 것은, 진정한 소득은 무엇이었나. 


우리에게는 또 다른 모순의 부산물을 남기셨다. 


누구도 할머니들에게 진정성있는, 용기있는 직언을 한 이가 단 한 명도 없었다. 


할머니를 피해자로만 인식해서 동정할 뿐, 할머니를 위하는 일이라고는 우리 후손에게 이러한 산 증인으로 과거사를 전달하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이를 통해서 일본에 대한 증오를 키우고 한일 관계를 악화시키는 여론 몰이로 활용되어 버렸다. 


할머니들께서 뭘 아시겠나. 


주변에서 전부 그렇다라고만 하고, 이에 대해 잘 납득시켜 드려서, 한일 관계 우호에 협력을 구하지는 못 할 망정, 할머니를 악용해서 자신들의 잇속을 불리는 파렴치들이 등장하고 말았다. 




할머니께서 고초를 겪으셨지만, 우리 후손들은 무능하지 않겠노라고, 다시는 우리 후손들이 할머님처럼 어려움 겪는 일 없도록 저희들이 분발하겠노라고, 일본을 원망하지 마시고, 전쟁과 침략의 참혹함을 깨닫게 해 주신 데 대해 후손들이 반드시 각성하며 살아가겠노라고 다짐했더라면, 할머니들께서도 일본에 대한 원망을 내려 놓고 조용히 새 삶을 살아 가신다거나, 한일 우호의 일선에서 일하시진 못 하더라도, 우리 국민들에게 많은 교훈을 주시는 활동을 하면서 존경받는 위치로 도약하도록 도울 수 있었을 텐데, 오늘 이러한 사태를 보고 배신감을 넘어,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를 맞이했다는 착잡함을 금하지 못 한다. 


일본에게 “당했다.”, 말고는 다른 인식이 없는 할머니들, 그 할머니를 둘러싼 간신배 매국노들, 정의기억 연대라는 작자들 말에 혹해서 많이도 일본을 헐뜯고, 돈도 갖다 바쳤는데, 결과는 오늘 어떠한가. 


여지없이 우리를 놀라게 하고 말았다. 




우리는 반 쪽 짜리 역사를 갖고 있었고, 일본과의 관계도 악화되었을 뿐 아니라, 할머니들도 역사의 교훈을 얻은 바가 없이, 남은 여생마저 아픔과 증오만 키웠을 뿐이다. 


후손들이 이와 같은 할머니의 아픔을 승화시키지 못 했다. 


거기에 동조해서 많은 이들이 후원과 기부라는 형태로 돈을 갖다 줬는데, 결국은 할머니들에게 돌아 간 돈은 아주 극소액이며, 전부 정의기억 연대들의 사익과 잔치에 쓰이고 말았다. 


우리에게 남은 것은 계속 되는 악결과의 깊은 수렁의 연속이다. 


우리는 이제라도 인식하고 배워야 한다. 


우리가 옳다고 믿어 온 길이 이와 같은 자괴에 이르렀다. 


이마저도 일본 탓으로 돌려야 하는가. 




단체만의 문제가 아니다. 


거기에 동조한 정치인, 그런 정치인을 뽑아 준 국민들, 할머니를 간판에 내 놓고 장사할 때 옳다면서 돈 낸 이들, 소녀상 내세워서 일본 증오 활동 벌일 때 애국하는 일이라며 참여해서 앞장선 이들, 이에 적극 동조하지는 못 해도 그들 의견에 동의하면서 지켜 보기만 한 국민들, 다 공동 작품이다. 


우리 국민들 모두 반성해야 한다. 


그들을 엄벌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또 그들만 탓하고서 우리 국민들이 아무 반성없이 살아 간다면, 저런 매국노는 계속 해서 우리 사회의 어두운 곳에 규합해서 또 혼란하게 할 것이다. 


저들을 판치게 한 것은, 우리 국민들도 저들을 알아 보지 못 한 것에서 더 나아가, 그들의 의견의 찬성하면서 간접적으로 힘을 실어 준 게 아니었는가 말이다. 




정의는 기억할 수 없다. 


정의가 무엇인 줄도 모르고, 정의롭게 살 수가 없었는데, 무슨 정의를 기억한단 말인가. 


그들이 말하는 정의는, 복수와 증오를 뜻하는 것이다. 


일본이 가해자이므로, 그들에게 고통을 되돌려 줘야 한다고, 내친 김에 우리도 똑같이 일본을 침략해서 2 배, 3 배로 가해하면 더욱 정의롭겠다. 


그 것은 증오와 보복일 뿐, 정의가 아니다. 얼토당토 않다. 


정의는 우리가 새롭게 세워야 한다. 


그 것은, 우리의 모습을 바로 보는 것부터 시작한다. 


우리 민족은 당시에 국제 정세를 모르는 우물 안 개구리였고, 일본이 국력을 키우는 것도 눈뜨고 지켜 보면서, 우리 국력을 키우면서 경계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무방비로 앉아 있었는데, 어찌 최신 무기와 잘 훈련된 일본군을 막을 수 있었겠는가. 




중국의 침략은 일본보다 훨씬 많은, 1000 회에 가깝게 역사서에 기록돼 있다. 


역사서에 기록되지 못 한 것을 따지자면 1000 번은 넘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거의 번번히 막아 왔으며, 우리는 중국을 미워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일본은 임진왜란, 정유재란, 을사조약, 세 번을 전부 톡톡히 당했다. 


중국은 대국이라 경계했지만, 일본은 섬나라 오랑캐라며 멸시한 것은 사실아닌가. 


그 오랑캐가 엄청난 성장으로 우리 민족을 번번히 압도했다. 


우리 민족의 오만이었다. 


그들이 오랑캐가 맞고, 우리는 수준높은 양반 민족이라면, 어찌 우리가 그들에게 그렇게 당하는 것이 가능했었는가. 


우리는 이 치욕의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한다. 


그들이 우리에게 준 아픔만 보려 하지 말고, 우리가 이러한 화를 자초한 오만과 나태함을 직시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모른다. 


여전히 일본은 증오와 멸시의 대상이며, 일본이 어려운 일에 직면할 때에 격려와 도움은 커녕, 웃으며 박수를 치면서 자축하기에 여념이 없다. 


그러면서도 일본이 아시아의 선진국이라는 사실에 대해 공공연하지 못 하게 불편해 한다. 


용기있게 우리의 과오를 직시하기 시작할 때, 정의가 실현되는 것이다. 


그런 그들이 어찌 감히 정의라는 준엄한 단어를 함부로 훔쳐서 자기들 얼굴에 붙이는가. 


누가 그 정의라는 간판 딱지에 박수를 쳐 주고 웃어 주었는가. 정의는 없다. 


단어는 존재하지만, 정의는 이 세상에 살아 있지 못 하다. 




새로운 정의를 실현해야 한다. 


저런 역적 매국노를 엄벌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저런 것들에게 힘을 실어 준 우리부터 처절하게 자성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우리가 이 땅에 뿌린 과오의 오점, 그 것을 씻어 내는 정화 의식을 시작해야 한다. 


그래야 정의의 씨앗이 뿌려 진다. 정의라는 숭고한 단어를 함부로 모욕하지 마라. 


그 대가는 내 가슴을 낱낱이 찢어도 풀리지 않는 치욕과 한으로 돌아 오리니. 

매거진의 이전글 위안부 문제와 윤미향 비리 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